몸에 들어가면 물뽕 변환, 의식 상실… 범행후엔 금방 분해돼 검출 어려워
중간에 정신 차린 여성 신고로 덜미, 법조계 “해외처럼 마약 지정해야”
그래픽 뉴스1
‘버닝썬’ 사건을 통해 ‘데이트 강간 약물’로 알려진 감마하이드록시낙산(GHB·속칭 ‘물뽕’)의 원료인 감마부티로락톤(GBL)을 사용해 여성을 성폭행한 사례에 대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 나왔다. 법조계에선 GBL의 마약류 지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뽕 원료도 물뽕 효과 나와…2000명분 구입한 약사
18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수원지법은 17일 GBL을 사용해 여성 2명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약사 A 씨(35)의 강간상해 혐의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A 씨는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고소득 사업가 등만이 가입할 수 있는 한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해 올 2월 피해 여성 B 씨를 만났다. 직업 등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앱 특성상 B 씨는 A 씨를 신뢰했지만 처음 만난 날 A 씨는 B 씨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술잔에 GBL을 탔다. 의식을 잃은 B 씨에게 A 씨는 성폭력을 저질렀지만 물뽕의 영향으로 B 씨는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했다.
이후 A 씨는 올 3월에도 같은 앱을 통해 다른 여성 C 씨를 만난 뒤 술잔에 GBL을 타 의식을 잃은 C 씨를 자신의 승용차로 데려갔다. C 씨는 성폭력이 발생하는 도중 의식을 차리고 도주했고 바로 경찰서를 찾았다.
서초경찰서는 C 씨의 소변에서 물뽕을 검출했지만 서울중앙지법은 올 8월 “약국을 팔아 합의하겠다”는 A 씨의 주장에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사건을 이송 받은 수원지검은 수사 끝에 A 씨가 GBL 2000명분인 1000mL를 구매했고 총 6명의 여성에게 GBL을 사용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받아내 A 씨를 구속했다. A 씨가 약국을 팔아 합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다수의 여성에게 GBL을 사용한 게 반영됐다.
●여태껏 ‘물뽕 데이트 강간’ 처벌 0건, 법망 사각지대
데이트 강간 피해자 체내에서 물뽕이 검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GBL은 물뽕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원료물질로, 체내에 들어가면 물뽕으로 변환된다. GBL과 물뽕 모두 1~4시간 만에 체내에서 분해되기 때문에 그간 검출이 불가능했다. 증거가 없어 지금까지 물뽕이나 GBL을 사용한 ‘데이트 강간’ 혐의로 처벌받은 사례는 한 건도 없었던 것. 물뽕은 피해자가 정신을 잃고 수시간 동안 기억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신고도 저조하다.
그런데도 GBL은 현행법상 마약류로 지정돼 있지 않고, 사람에게 투약시켜도 검출이나 처벌이 불가능해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뽕의 원료물질로만 등록돼 있는 GBL은 이를 사용해 물뽕을 제조한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고 GBL을 사람에게 먹이면 물뽕 효과를 내더라도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해외선 GBL 마약류 지정하고 사람에게 먹이면 처벌
전문가들은 해외처럼 물뽕의 원료인 GBL의 유통과 매매를 엄격히 관리해 사람에게 사용했을 경우 처벌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과 영국, 독일은 한국과 달리 GBL을 사람에게 사용할 경우 처벌하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2000년 “GBL과 물뽕은 약물 성범죄에 이용된다”며 관련법을 제정하고 법무부와 마약단속국(DEA)이 GBL의 제조와 유통, 수입·수출을 24시간 감시하며 기록을 철저히 검토하고 있다. 영국에선 GBL을 마약류 및 ‘약물 성범죄(DFSA)’ 물질로 지정해 무기징역형까지 가능하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올 9월 ‘외국의 데이트 강간 약물 이용 성범죄(DFSA) 규제와 시사점’ 보고서를 발표하며 “미국, 영국 등의 사례를 참조해 한국도 데이트 강간 약물을 지정해 유통을 엄격하게 규제·처벌할 필요가 있다”며 “데이트 강간 약물 금지법, 마약류 특별 관리 정책 등 구체적인 입법이 검토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가 주관한 마약위원회(CND) 회의에 참가했던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GBL은 페인트 세척 등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어 국제적으로도 무조건 소지를 금지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많다”며 “하지만 범죄 현장에서 GBL이 물뽕과 같은 용도로 데이트 강간에 사용되고 있는 만큼 산업계와의 논의를 통해 미국 법무부 감시 시스템 등과 같은 효율적인 규제 및 감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