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 벗어난 아이들] ‘미성년 빚 대물림 방지대책’ 한달
부모 빚 물려받은 재민이, 사회 손길에 굴레 벗었다
“석 달 새 부모를 연이어 잃고도 ‘혼자서 잘 살아보겠다’고 하더군요.”
경기 시흥시 연성동 행정복지센터 신미숙 복지팀장은 박재민(가명·17) 군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재민이는 올 7월 간암 투병 중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10월 어머니마저 숨지며 혼자가 됐다.
남은 건 부모님의 빚뿐이었다. 수년간 병원에서 지냈던 아버지는 개인회생 후 매달 18만 원씩 갚고 있었다. 어머니는 금리 연 10%의 카드론 450만 원을 남겼다. 재민이 통장으로 매달 기초생활 생계급여 55만 원이 들어오면 부채 상환 원금과 이자로 40여만 원이 빠져나갔다. 남은 돈으로는 먹거리를 사기도 어려웠다.
재민이 혼자 힘으로 빚을 처리할 수도 없었다. 민법상 친척 등이 친권자로 지정된 뒤 재민이를 대리해 채무 상속 포기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재민이는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 재민이에게 최근 희망이 생겼다. 본보가 올 5월 ‘빚더미 물려받은 아이들’ 시리즈를 통해 빚의 대물림에 고통받는 아이들의 사연과 법의 허점을 지적한 뒤 정부가 ‘미성년 빚 대물림 방지 대책’을 내놨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달 1일부터 부모 등 친권자가 사망하면 지방자치단체와 대한법률구조공단(구조공단)이 미성년자 유족의 채무 상속 포기를 일괄 지원하는 제도가 시행됐다. 재민이를 만난 후 신 팀장은 6일 구조공단으로 ‘위기아동 법률구조 요청서’를 보냈고, 구조공단은 최근 이모를 후견인으로 지정해 상속 포기 절차를 밟고 있다.
신 팀장은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재민이에게 (우리 사회가) 적어도 빚부터 물려주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구조공단에 따르면 대책 시행 이후 채 한 달이 안 된 28일까지 10명의 아이가 이 제도를 통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별도의 상속 포기 절차 없이도 미성년자가 재산보다 많은 빚을 물려받지 않도록 민법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랑스와 독일 등이 이미 유사한 법을 시행 중이다. 본보 보도 전후로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백혜련 의원 등이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제대로 된 논의 한번 없이 반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이다.
재산보다 많은 빚 떠안게된 미성년, 복지센터 직원이 법률구조 요청
구조공단, 상속포기 절차 등 지원…전국 곳곳서 지원 요청서 보내와
“복지 담당자가 선제적 발굴해 빚더미 안고 사회 첫발 막아야”
부산에 사는 A 군(16)은 올 9월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잃은 A 군에게 남겨진 것은 아버지가 남긴 재산보다 많은 빚이었다. 자칫 빚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뻔한 A 군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부산지역 복지센터의 한 직원이었다.
법무부,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가 연계한 ‘미성년 빚 대물림 방지대책’이 이달 1일 시행됐다. 부산 복지센터의 이 직원은 대책이 시행된다는 교육을 지난달 30일 대한법률구조공단(구조공단)에서 받다가 A 군의 사정을 떠올렸다. 이 직원은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아이의 이름 석 자가 뇌리에 계속 박혀 있었다”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빚까지 물려받은 아이라 더욱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직원은 다음 날 A 군의 고모를 통해 ‘정확한 부채 규모는 모르지만 A 군의 아버지가 재산보다 많은 빚을 남겼다’는 말을 듣고 곧장 경북 김천시에 있는 구조공단 본부에 ‘위기아동 법률구조 요청서’를 보냈다. 요청서는 이달 2일 도착했다. 대책 시행 하루 만이다. 구조공단은 A 군의 고모를 법정 후견인으로 신청한 뒤 상속재산 조회부터 상속 포기 절차까지 일괄 지원하고 있다.
구조공단에 따르면 대책 시행 이후 전국 곳곳에서 법률 지원 신청서가 도착했다. 그 결과 이달 28일까지 10명의 아이가 이 제도를 통해 빚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생후 6개월 된 갓난아기부터 18세 청소년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구조공단 내부에서도 “부모 등 친권자가 죽고 빚부터 물려받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는 반응이 나왔다.
○ “복지 담당자가 선제적 발굴해야”
법무부는 이달 1일 ‘미성년 빚 대물림 방지대책’을 발표하면서 친권자가 세상을 떠나고 미성년자만 남은 경우뿐 아니라 유족 가운데 친권자가 있더라도 별거 등의 사유로 법률 대리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적극 법률 지원에 나서달라고 지자체 등에 권고했다.
지난달 25일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수천만 원에 이르는 빚을 물려받은 B 양(2)도 지자체 담당자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에 채무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B 양에겐 상속 포기 등 법적 절차를 밟아줄 어머니가 있었지만 중국 출신으로 우리말이 서툴고 법 절차를 잘 몰랐다.
지난달 말 B 양의 어머니로부터 남편의 사망신고 서류를 접수한 제주시 한 주민센터의 정모 주무관은 제도 시행 하루 만인 2일 구조공단에 B 양의 구조 요청서를 제출했다. 정 주무관은 “외국인 어머니가 한국에서 법률적 행위를 하기 쉽지 않고, 한국어마저 서툴러 즉시 개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공단의 위승용 변호사는 “지금으로서는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자치단체 복지 담당자가 부모 등 친권자가 사망한 미성년 가정에 적극 개입해 사례를 발굴해야 ‘빚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부모가 남긴 재산 없다면 법률 지원 신청”
이달 13일 구조공단에는 태어난 지 6개월이 갓 넘은 C 양의 ‘법률구조 요청서’가 들어왔다. 홀로 아이를 키우던 어머니가 지난달 세상을 떠난 뒤 복지시설에 맡겨진 아이였다. 친권자가 없다 보니 어머니가 남긴 재산과 빚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아이의 사례를 관리하는 대전지역의 한 복지 담당자는 “상속재산을 조회해 부채 규모를 파악하는 등 법률 지원이 필요하다”고 구조공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구조공단은 “구체적인 부채 규모를 알지 못하더라도 아이가 친권자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대체로 빚이 더 많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우선 구조공단에 법률 지원 신청을 하길 바란다”고 답했다. 위 변호사는 “부모의 빚을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지 못하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채가 불어날 수 있다”며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아이들이 빚을 떠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