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상기후로 인한 역대급 가뭄이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세계 3대 경제권인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이 사상 최악의 가뭄과 폭염으로 신음하면서 공급망 붕괴와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과 CNN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EU의 국내총생산(GDP·구매력 평가 기준)은 전 세계의 약 절반(49.21%)를 차지한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가 향후 세계 경제를 압박하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난 18일 캘리포니아주 헤스페리아의 한 하천이 가뭄으로 강 바닥이 드러난 가운데 바닥 위에 입수 주의를 알리는 경고문이 세워져 있다. AFP=연합뉴스
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연구진에 따르면 20년 전부터 시작된 미국 서부지역의 가뭄은 최근 1200년 만에 가장 나쁜 상황이다. EU 집행위원회 연합연구센터(JRC)의 안드레아 토레티 연구원은 “유럽의 가뭄은 지난 500년 이래 가장 심각하다”고 봤다. 중국 기상과학원도 쓰촨(四川)성을 비롯한 중국 중서부 지역의 폭염이 1961년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근의 폭염이 최장·최강이며 강우량도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17일 중국 충칭시를 가로지르는 자링강이 바닥을 드러냈다. 사진 중국 신화망 캡처
이로 인해 세 지역 모두 각 분야에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일단 농·어업이 문제다. 미국 최대 농업지대 캘리포니아는 수원지인 시에라 네바다 산에 쌓인 눈이 너무 빨리 녹아 물이 부족하다. 미 서부 약 4000만 명의 상수원이자 이 일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콜로라도강의 수위가 바닥을 드러냈다. 연방정부는 지난 16일 애리조나·네바다 등 콜로라도강이 흐르는 지역의 물 공급을 제한하고 나섰다.
애리조나주 유마 카운티에서는 올해 최소 3억4000만달러(약 4555억원)의 농작물 손실이 예상된다. 미국의 면화 생산량도 전년 대비 28% 감소해 2009년 이후 최소를 기록할 전망이다. 폭염으로 어업 생산량도 변화를 겪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008년 2720만 파운드(약 1만2338t)에 달했던 알래스카 해역에서의 왕게 어획량이 극심한 폭염으로 지난해 600만 파운드로 급감했다”며 “기후변화가 기존 어업에 궤멸적 타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라고 지적했다.
중국에서도 쓰촨, 충칭, 후베이, 장시, 안후이 등 창장(長江·양쯔강) 일대 9개 성과 시에서 가축 35만 마리가 식수난을 겪고, 21만5000㎢의 농작물이 가뭄 피해를 봤다고 중국중앙TV(CC-TV)가 전했다. 유럽의 스페인에선 가뭄으로 올리브 오일 생산량이 약 3분의 1 가까이 감소할 전망이다.
지난 18일 독일 쾰른시를 흐르는 라인강이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EPA=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강이 말라붙으면서 물류와 에너지 공급에 타격이 온다는 점이다. 서유럽 내륙 수상 운송의 80%를 담당하는 독일의 라인강은 바지선이 상시 운항할 수 있는 여유 수심 기준점(40㎝)에 못 미쳐 물류 수송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에 독일 정부가 승객 운송보다 석탄 조달을 우선시하는 철도망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전했다. 중국에서도 창장 수위가 내려가면서 수운에 차질이 생겼다. 중국 내 물류의 16%는 내륙 하천과 연안을 통해 이동한다.
지난 17일 중국 충칭시 자링강에 놓여진 첸스먼(千?門)대교가 가뭄에 바닥을 드러냈다. 사진 중국 신화망 캡처
가뭄으로 인한 전력난에 제조업 위기도 현실화됐다. 쓰촨성은 전력의 80%를 수력 발전으로 충당하는데 가뭄으로 차질을 빚자 인근 간쑤성에서 전기를 끌어오고 있다. 앞서 쓰촨성 정부는 지난 15~20일로 예정한 산업시설 단전 조치를 25일까지로 연장했다. 이로 인해 도요타와 폭스바겐, 지리자동차 등 완성차 업체의 공장이 가동을 중단했다. 애플의 최대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폭스콘, 리튬 배터리 소재를 제조하는 닝더스다이(寧德時代·CATL) 등도 공장을 멈춰야 했다. CNN은 “가뭄으로 인해 CATL 등 전기차 배터리 등 핵심 원자재 가격 상승 가능성이 커졌다”고 전했다. 이에 쓰촨성에서 부품을 공급받아 온 테슬라 등 글로벌 전기차 업체도 공급난에 처했다. 프랑스에선 원자료 냉각수로 사용하는 루아르강의 수온 문제로 발전 효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 현상이 일상화될 것이고 세계 경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 가뭄은 토지 황폐화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2000년 이후 29% 증가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벤 메이 글로벌 거시경제 담당국장은 CNN에 “극단적인 날씨 변화는 공급망을 취약하게 하고 식품과 에너지 가격 상승을 부채질해 인플레이션 위험을 낮추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 세계 무역의 약 80%는 선박을 통해 이뤄진다”며 “강을 통한 내륙 수운은 가뭄이 닥치면 별다른 대안이 없기에 상품 제조 및 유통 등 공급망 전체에 치명적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미 투자정보업체 무디스인베스터스 서비스는 여행, 제조업, 농업 등에 미치는 장기간의 가뭄과 폭염의 영향이 남유럽 일대 국가들의 신용등급에 장기 하락을 가져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