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총리, 정책 대전환 예고
전력난·우크라發 수급 불안 심화
“차세대 혁신로 필요” 입장 선회
기존 원전 가동 연한도 늘리기로
“후쿠시마 사태 잊었나” 반대 비등
일각 가스요금 상승 우려 찬성도
‘일본 에너지 정책의 대전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최근 원자력발전소 신·증설 검토와 기존 원전 재가동이라는 에너지 정책의 충격적 신(新)방침을 밝히자 일본 사회의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경제적이고 안정적 에너지원(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와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폭발사고가 상징하는 원전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당시 쓰나미(지진해일)가 덮쳐 폭발이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사고 직후 처참한 모습.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원전 신·증설 검토 의사를 밝히면서 일본 사회의 찬반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원전 신·증설 검토… 정책 대변환
기시다 총리는 지난달 24일 탈(脫)탄소 사회 실현을 논의하는 GX(그린 트랜스포메이션) 실행 회의에서 “차세대형 혁신로(爐) 개발·건설 등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항목이 제시됐다. 여러 방안에 관해 연말에 구체적인 결론을 낼 수 있도록 검토를 가속해달라”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 발언은 원전 신·증설 재개를 위한 정책 전환 수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여파로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후 당시 원전 54기에 대해 전면 가동 중단 조치를 내렸다. 당시 민주당 정권은 원전을 모두 폐로(廢爐)한다는 원전 제로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2012년 12월 자민당이 정권을 탈환하면서 원전 제로 정책을 백지화하고 원전 재가동을 시작했으나 신규 원전의 건설을 의미하는 신·증설은 그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기시다 총리 본인도 그동안 원전 신·증설과 관련해서는 “원전 신설, 재건축은 상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요미우리신문은 차세대 혁신로 개발·건설과 관련해 “경제산업성(경산성)은 개량형 경수로의 상업운전을 2030년대에 개시하고, 소형 원자로 여러 개를 연결하는 소형모듈원전(SMR) 등은 2040년대에 실용화할 계획”이라고 구체적인 시간표도 소개했다.
기시다 총리는 기존 원전에 대해서도 가동 기간을 늘리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원전 신·증설은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일단 기존 원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이후 원전 가동 기간을 원칙적으로 40년으로 하되 한 번에 한해 20년 연장이 가능하도록 법률로 정했다. 법률상 최장 60년이 경과한 원전은 폐로해야 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도쿄=AFP연합뉴스 |
경산성에 따르면 일본에는 현재 원자로 36기가 있다. 이 중 25기가 재가동을 신청해 17기가 심사를 통과했으나 미하마(美浜) 원전 3호기, 다카하마(高浜) 원전 1·2호기 등 4기의 연장이 불허된 건 이런 규정 때문이다. 신·증설 없이 법률상 가동 기간 원칙을 적용하면 일본 원전은 2090년이면 전부 사라질 운명이었다.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재가동 심사를 통과한 17기 중 현재 운전하고 있는 원전은 다카하마 3호기 등 6기 뿐이고, 나머지는 지방자치단체, 주민 반대로 실제 운전은 못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이(大飯) 3호기 등 4기는 올해 겨울까지, 가시와자키가리와(柏崎刈羽) 6호기 등 7기는 내년 여름 이후를 재가동 시점으로 잡았다.
◆에너지난·공급망 불안에 유턴
이번 정책 변화의 지향점은 원전을 통한 전력공급 안정성 확보다. 이상고온 등으로 인한 전력 수요 급증,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에너지 공급 불안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재가동이 추진 중인 원자로(3호기)가 포함된 후쿠이현 미하마 원전. 세계일보 자료사진 |
특히 최근 전력 부족 우려가 고조한 것이 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른 무더위에 6월26일에는 전력수급 핍박주의보가 처음으로 발령됐다. 핍박주의보는 전력예비율이 5% 아래로 떨어질 것이 예상될 때 나온다. 전력 부족에 대비해 화력발전소 2기를 임시로 재가동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영향으로 전 세계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 것도 영향을 주는 요소로 꼽힌다. 일본의 전력원 중 액화천연가스(LNG)가 39%(2020년 기준)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LNG나 석유, 석탄 등 화석연료를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경산성은 원전 1기를 가동하면 LNG 이용량 약 100만t을 줄일 수 있다고 추산하고 있다.
일본이 수입하는 LNG의 9% 정도가 러시아산이다. 이 중 대부분을 러시아, 영국, 일본 기업이 합자해 운영하는 사할린-2에서 조달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6월 러시아가 다른 기업에 사할린-2의 운영권을 넘기겠다며 일본 기업에 새로운 계약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 제재에 앞장선 일본에 대한 보복성 조치였다. 해외 의존도가 높은 일본의 에너지 공급망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원전 활용 쪽으로 기울었다. 지난해 10월 각의(국무회의)에서 결정된 에너지기본계획에는 원전에 대해 “가능한 한 의존도를 낮춘다”고 했으나 지난 6월에 나온 경제재정운영지침은 “원자력의 최대한 활용”을 명시했다.
2012년 6월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도쿄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이후 일본 사회에서 원전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후쿠시마 비극 잊었나” 부정론 여전
에너지 정책전환의 진통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불안이 여전하다. 아사히신문이 지난달 27∼2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원전 신·증설에 반대한다는 대답이 58%에 달했다.
지난해 이바라키(茨城)현 주민 등 240여명은 도카이(東海) 제2원전 재가동 금지를 청구했다. 원전 주변 30㎞ 내 지자체에 대한 대피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음을 지적했고, 승소했다. 해당 원전은 일본 정부가 내년 재가동 대상으로 정한 곳 중 하나다.
원전 사고 피해자들은 “후쿠시마의 교훈을 경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고 이후 고향을 떠난 후쿠시마 주민 가나이 나오코(金井直子)는 지지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사고 원인 규명, 오염폐기물 처리 등이 끝나지 않았다”며 “(원전의 신·증설을) 절대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다”고 말했다. 오시마 겐이치(大島堅一) 류코쿠대(龍谷大) 교수는 아사히신문에 “(지진, 화산, 쓰나미 등으로 인한) 재해대국 일본에서 원전 활용은 위험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재가동이 추진 중인 원자로(3호기)가 포함된 후쿠이현 미하마 원전. 세계일보 자료사진 |
정치권 내부의 신중론도 강하다. 연립여당 공명당은 지난 7월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원전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 달성을 목표로 내세웠다. 다케우치 유즈루 공명당 정무조사회장(정책위 의장 격)은 “원전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원전 제로 사회’가 당 강령이다.
여론조사의 문항에 따라서는 원전에 대한 긴장감이 과거보다 이완되는 흐름도 변수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이 지난달 25일 공개한 우편여론조사 결과에서는 ‘규제 기준을 충족한 원전 운전 재개’에 대해 찬성이 58%, 반대가 39%였다. 2017년 이후 해당 설문에 대해 찬성이 절반을 넘은 건 처음이다. 에너지 가격, 전기·가스 요금의 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이 원전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러, 가스밸브 잠그자 獨 “최악의 겨울 올라”… 원전 폐쇄 연기 검토
독일 정부도 에너지 위기에 탈(脫)원전 노선에서 유턴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7월 25일(현지시간) 독일 링엔에 있는 엠슬란트 원자력발전소의 냉각탑에서 수증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링엔=EPA연합뉴스 |
탈원전을 지향해온 독일이 마지막 남은 원전 3곳의 폐쇄를 연기하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복수의 독일 정부 관리를 인용해 보도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 속에 최근 러시아가 독일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줄이면서 독일이 올해 겨울 에너지 부족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움직임이다.
WSJ는 이는 일시적이나 2000년대 초반 시작된 원전의 단계적 중단정책 기조에서 처음으로 벗어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결정은 아직 올라프 숄츠 독일 내각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지는 않았으며, 의회의 표결을 거쳐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2000년대 초반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한 독일은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폭발사고가 발생한 직후 이에 속도를 내기로 하고 2022년 말까지 가동 중인 원전을 모두 닫기로 한 바 있다.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