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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암살·대지진 후 혼란… 물가 폭등 겹쳐
“연료 인상” 발표에 시민 반발, 갱단 폭력 기승
전기공급 안 돼… 병원·통신 서비스 중단 ‘위기’
목숨 건 탈출… 도미니카 “난민 막아라” 장벽


지난해 대통령 암살 후 대혼란에 빠진 아이티가 갱단의 폭력 사태까지 더해져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잇단 재난과 강력사건으로 사회 혼란이 수습되지 않은 가운데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따른 물가 폭등과 연료 부족이 큰 충격을 주면서 벌어진 비극이다. 한국 외교당국은 아이티 상황에 우려를 표명하며 교민들에게 주변국으로 철수하라고 권고했다.

 

지난 16일(현지시간)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총리 퇴진 요구와 연료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한 시위자가 불타는 바리케이드에 타이어를 추가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병원도 문닫기 직전…‘연료 부족’ 심각

아이티는 ‘카리브의 가난한 섬나라’로 불리는 만큼 세계적 원자재, 곡물 등 가격 상승의 충격을 어느 나라보다 크게 받았다. 특히 연료난으로 송금 등 은행 업무나 응급 의료, 인터넷·통신, 교통수단 등 서비스가 제한될 위기에 놓였다. 국민들이 일상 생활을 원활히 할 수 없을 만큼 전기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티 정부는 결국 지난 11일 연료비 인상을 발표했다. 이는 혼란한 사회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시민들은 즉각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고, 무장 갱단이 연일 거리로 나와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있다. 최근에는 갱단이 수도 포르토프랭스 주요 연료 창고 앞에 구덩이를 파 놓거나 입구 쪽에 있던 대형 컨테이너를 무질서하게 배치하는 방법으로 연료 운송을 방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전국적인 전력 부족 가능성이 더 커지는 등 사태가 커지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그간 자체적으로 디젤 발전기에 의존하고 있던 병원들도 강제로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유엔아동기금(UNISEF·유니세프)은 최근 성명에서 “병원들이 신규 환자를 수용할 수 없고, 아예 폐원을 준비하고 있다”며 “무균 환경을 만들기가 어려워지고 있고, 저온유통(콜드체인) 설비를 가동하지 못해 백신을 보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8일(현지시간) 한 남자가 연료 가격 인상에 반대하는 파업 동안 연료를 비축하기 위해 여러 개의 양동이를 들고 다니는 모습. 포르토프랭스=EPA연합뉴스

 

현재 아이티에서 운영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병원은 전체 75%에 이르는 것으로 유니세프는 추산했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27일(현지시간) “향후 4주간 필수 건강관리 서비스를 받지 못할 위험에 처한 5세 미만 영유아는 5만명에 달한다는 게 유니세프의 설명”이라며 이 중에는 신생아 2만8000여명도 있다고 밝혔다. 일부 국제기구에서 태양광 발전기 설치를 위해 협력하고 있으나, 당장 전력 부족 문제를 해소할 수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보건당국과 함께 의료물품을 공급하는 한편, 주요 공공병원 응급의료 서비스를 재정비하고 있다.

통신 시스템도 차질을 빚고 있다. 아이티 최대 통신업체 ‘디지셀’의 마르텐 부테 대표는 전날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가 보유한 안테나의 약 30% 정도가 연료 부족으로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썼다.

 

28일(현지시간) 총파업이 진행 중인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한 시위자가 아리엘 앙리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포르토프랭스=AFP연합뉴스

 

◆갱단 활개로 무법천지…“아이티 떠나라”

아이티를 겸임국으로 둔 주도미니카 한국대사관은 28일 “아이티의 사회 혼란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며 “아이티에 거주 중인 교민께서는 상황이 진전될 때까지 도미니카공화국이나 아이티와 가까운 이웃 나라로 철수해 달라”고 공지했다.

혼란을 틈타 갱단이 기승을 부리면서 최근 사회 불안이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신에 따르면 무고한 민간인 수백 명이 희생되거나, 갱단이 연루된 납치·성폭행 등 강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시테솔레이 지역에서 지난 6월이만 155건의 납치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상점 약탈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유엔식량계획 현지 사무소가 공격을 당했다. 갱단끼리의 충돌도 발생했으며, 이를 취재하던 언론인 두 명이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다만 현재까지 우리 교민 피해는 접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6일(현지시간) 오토바이 택시 운전사가 연료 가격 인상에 항의하고 총리 퇴진을 요구하기 위해 시위대가 설치한 불타는 바리케이드를 지나가고 있다. 포르토프랭스=AP연합뉴스

 

아이티 갱단의 폭력사태는 갑자기 부상한 일은 아니다. 지난해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자택에서 암살된 뒤부터 아이티의 정치·사회 기능은 서서히 마비돼 왔다. 8월엔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22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잇따라 발생한 재앙을 수습할 리더십도 부재했다. 총선 연기로 국회는 공백 상태였고, 헌법상 대통령직 승계 대상인 대법원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숨졌다. 대통령이 숨지기 직전 임명한 총리는 취임 전이었다. 결국 취임을 앞두고 있던 아리엘 앙리 총리가 총리직을 맡게 됐지만, 그가 모이즈 대통령 암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나오면서 시민들과 일부 갱단이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등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아이티는 원래부터 치안이 좋지 않았던 데다 공권력의 부재가 장기화하면서 갱단들이 세력을 키우게 됐다.

이에 아이티 국민들은 목숨을 걸고 조국을 탈출하고 있다. 미국령 푸에르토 리코 근해에서는 아이티 난민을 가득 태운 배가 침몰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배를 타지 못한 난민들은 아이티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향한다. 난민지원 단체에 따르면 지난해 국경을 넘었다가 아이티로 다시 송환된 난민만 2만8000명 이상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아이티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을 따라 길이 164㎞, 높이 약 4m의 장벽을 쌓고 있다.

 

28일(현지시간) 한 여자와 아이들이 연기가 나는 쓰레기 더미 옆으로 걸어가고 있다. 포르토프랭스=AP연합뉴스

 

루이스 아비나데르 도미티카 공화국 대통령은 지난 15일 미주기구(OAS) 회의에 참석해 “아이티 갱단의 조직 범죄가 도미니카 공화국에도 침투해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국제사회가 아이티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했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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