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원의 이유 있는 유럽
우크라 전 고위 관계자가 전하는 뒷얘기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주력 전차인 레오파르트2 14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해 독일 북부 오스텐홀츠 군사기지에서 레오파르트2가 훈련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최근 <한겨레>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일반 시민부터 정부 고위 당국자까지 두루 만났습니다. 오늘은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한 인터뷰 내용을 전하려 합니다. 지난해 전쟁 초기부터 우크라이나 국토방위군에서 일하고 있는 이 관계자는 학계 출신으로 정계에서 30년 가까이 활동했고 주요 공직을 맡은 경험이 있습니다. 다만 국내 정치적 상황과 현재 하는 업무의 성격 등을 이유로 익명 보도를 요청해왔습니다. 전쟁 1년을 눈앞에 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치열히 대치 중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해를 한층 높일 수 있는 솔직한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25일(현지시각) 미국과 독일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주력 전차인 에이브럼스와 레오파르트2를 각각 제공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이 시작된 지난해 2월24일 이전부터 우크라이나는 탱크 등 공격형 무기를 서방 국가에 요청해왔습니다. 하지만 협력국, 특히 미국과 독일은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러시아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러시아군이 키이우 외곽 도시 부차에서 저지른 ‘학살’이 드러나고, 지난가을부터 우크라이나 민간 기반 시설 등을 무차별 공격하며 무고한 시민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들이 잇따르자 서방의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크림반도 되찾아야 평화 찾아올 것”
<한겨레>가 만난 이 군 관계자는 전쟁 초반부터 키이우에서 이런 변화를 가까이서 지켜봤습니다. 그는 “부차 대학살이 전세계에 알려진 뒤 더는 러시아의 만행을 묵과할 수 없게 됐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거부도 불가능해졌다. 서방의 군사·정치적 지원이 시작됐고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러시아가 총구를 군이 아닌 ‘민간인’에 겨누는데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분위기는 많이 달랐습니다. “(전쟁 초기) 서방은 우리를 러시아에 넘겨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생존할 줄 몰랐다. (이들은) 2021년 가을부터 키이우에서 자국 대사관을 아무 말도 없이 철수시켰다. 이는 러시아의 침공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민간인을 향한 러시아군의 잔혹한 공격에 더해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꺾이지 않는 ‘결사 항전’ 의지도 서방이 태도를 바꾸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2021년 크리스마스에 친척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이 나라에 남아 견디고 뭉쳐 저항 의지를 보여주면 그들은 결국 돌아올 것이고, 충분한 것 그 이상의 지원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실제 <뉴욕 타임스>는 공격용 무기 제공을 꺼리던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최근 태도를 바꾸고 있다고 지난 18일 익명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이 러시아가 점령 중인 크림반도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향후 협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다는 겁니다. 이 관계자에게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를 되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물었습니다. 그는 “크림반도를 지금 상태로 둘 경우 ‘2년 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하겠지만, 크림반도를 되찾고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 대한 비용과 대가를 치르게 하면 앞으로 20~30년 정도는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휴전’ 자체를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관계자는 다양한 방식의 휴전 모델에 대해 ‘판타지’라고 주장했습니다. “생존하고 싶다면 휴전을 통해 평화를 찾겠단 판타지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돈바스 전선 등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지만, 우리 영토를 일부라도 넘겨주면 이후 더 많은 피해를 보게 된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는 말도 보탰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1991년 독립한 우크라이나를 왜 계속 공격하는 걸까요. 그는 “러시아에 우크라이나는 유일한 경제 모델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러시아는 무역 루트로서 발트해와 흑해가 필요하다. 그 사이에 있는 영토, 곧 우크라이나는 자원 확보의 원천 가운데 하나다. 러시아 경제 모델은 수세기 동안 이 영토를 통제하는 것 위에 세워졌다. 그들에게 다른 대안은 없다. 궁극적으로 러시아가 언제든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우크라이나는 집어삼켜야만 하는 ‘목표’가 된다는 뜻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수준의 비용을 치르더라도 이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 관계자는 러시아의 핵 공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를 반길 것이라는 신화는 깨졌다. 우리는 살기 위해 싸운다. 이게 전쟁의 본질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서로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협상 조건을 내세웁니다. 그는 러시아와의 협상 가능성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눈속임을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마주 앉을 수 있겠나. 러시아의 패배 외에는 답이 없다.” 중재자가 있으면 좀 나을까요. 그는 독일, 프랑스 정부와 우크라이나-러시아 관계를 두고 여러차례 만나 협의한 경험을 들며 이들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나토 회의적, 자체 군사력 증강해야”
우크라이나에 대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지원 의지가 매우 강한 상황인데요. 향후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합류할 수 있을지도 궁금한 대목입니다. 이 관계자는 “회의적”이라고 했습니다. “나토가 러시아라는 영원한 적을 가진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 우리를 받아들이면 우리를 위해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자체적인 안보를 위해 더 강력하게 무장하는 데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토라는 군사동맹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도 보탰습니다. 군사동맹은 공동의 위협이 있어야 작동을 하는데 나토 회원국 가운데 “헝가리나 튀르키예의 경우 러시아를 전혀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부 서방 유럽국가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