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인프라도 바이 아메리칸’ 구체적 지침 내놔
미국 정부가 8일(현지 시각) 연방 자금이 투입되는 인프라 건설 사업에서 미국산(産)만 사용하도록 하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원칙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 지침을 내놨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연두교서(국정 연설)에서 “연방 기반 시설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모든 건축 자재를 미국에서 만들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기준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힌 지 하루 만이다. 국내 기업들은 “미 연방 정부와 계약한 미국 기업들이 미국산을 쓰게 되면 이들과 거래해온 우리 기업들엔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반응이다. 특히 이번 규제가 정부 조달 시장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민간 건설 영역으로 확대되면 타격이 상당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비철금속, 플라스틱, 유리 현지에서 생산해야
미 백악관 예산처(OMB)는 이날 연방 관보에 연방정부 자금을 지원받는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의 경우 비철금속, 플라스틱·폴리머 기반 제품, 유리, 광섬유 케이블, 광섬유, 목재, 건식 벽체 등 8가지 ‘건축 자재’를 엄격히 미국산으로 쓰도록 하는 내용의 시행 지침을 게재했다. 앞서 바이든 정부는 2021년 제정한 ‘인프라투자법’에 철강, 제조품, 건축 자재를 미국에서 제조된 것만 사용해야 한다는 조항을 담았는데 이번에 ‘건축 자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떤 경우 미국산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규정했다. 미국산 인정 기준은 비철금속의 경우 ‘초기 제련부터 최종 성형, 코팅, 조립까지 모든 제조 공정이 미국에서 이뤄진 경우’만 인정받을 수 있고, 플라스틱·폴리머 기반 제품은 초기 성분 배합부터 실제 건설 현장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되기까지 모든 공정이 미국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수입 부분품을 미국 현지에서 가공해 미국산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을 막은 것이다.
국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조달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국내 업체들이 미국 연방정부 조달 시장에 납품한 물량은 684만건, 98억달러(약 12조원)에 이르지만, 미국 현지가 아닌 대부분 주한 미군에 납품한 물량으로 추정된다. 코트라 관계자는 “미국 조달시장 문턱이 높아 직접 참여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며 “이번 조치로 당장 우리 기업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인프라투자법,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등을 통해 철강·전기차·배터리·태양광 등의 분야에서 현지 생산을 압박해온 흐름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이번엔 연방 정부 조달 물량으로 국한됐지만, 민간 영역으로 범위를 확대하고 더 많은 품목을 포함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한 전선업체 관계자는 “민간 계약까지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현지 생산을 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이번 지침이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을 의식한 ‘국내용 메시지’라는 분석도 나온다. 비싸고 수급도 원활하지 않은 미국산 건축 자재만 쓰라고 엄격히 요구할 수 없을 것이란 얘기다. 그렇더라도 미국 수출 시장 비중이 점차 커지는 우리 입장에선 철저한 사전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상징적인 의미가 큰 발언과 지침으로 보이지만, IRA 시행으로 전기차와 배터리 업계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품목별로 그에 못지않은 타격을 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진단했다. 코트라 워싱턴무역관은 “시행 지침에서 미국산만 사용하는 것이 공공 이익에 반하거나 특정 품목의 미국 내 생산·공급이 불충분한 경우 바이 아메리카 규정을 면제할 수 있도록 한 만큼 이런 규정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