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요충지 아니었으나 와그너그룹 투입으로 매몰비용 커져
우크라, 춘계공세 위해 후퇴 가능성…와그너 '인해전술'도 더는 불가
지난달 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동부 도시 바흐무트 인근에서 러시아군의 침공에 대비해 참호를 파고 있다. 2023.02.01/뉴스1 ⓒ AFP=뉴스1 ⓒ News1 김민수 기자
러시아군이 수개월간의 접전 끝에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인 바흐무트의 동·북·남 3면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지난해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마리우폴처럼 이번 전쟁의 대표적인 지표가 되면서 우크라이나 측에서도 쉽게 백기를 들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현재 바흐무트의 동쪽, 북쪽, 남쪽 3면을 점령하고 있으며 바흐무트와 우크라이나군이 통제하는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영국 국방부도 바흐무트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점점 더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도시 북쪽 가장자리에서 러시아가 추가 진격을 해왔다고 전했다.
당초 바흐무트는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었지만, 러시아 민간용병 와그너그룹이 바흐무트 점령에 뛰어들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이 지역에서 발을 빼기 힘들어졌다. 와그너그룹은 지난해 러시아 교도소에서 모집한 5만 명의 용병을 바흐무트로 보냈다. 이들은 전장에서 6개월간 살아남을 경우 사면받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도네츠크 동부 지역인 바흐무트는 인구가 7만 명에 불과한 데다 동부 대도시인 크라마토르스크, 슬로뱐스크와도 30마일(약 48㎞) 이상 떨어져 있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의 러시아 분석가인 캐롤리나 허드는 워싱턴포스트(WP)에 "바흐무트는 상징적으로 또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와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바흐무트의 소금, 석고 광산을 노리며 용병 투입에 동의한 것 아니냐는 데 무게가 실린다. 바흐무트 주변 지역에는 유럽 최대의 소금 생산업체인 국영 기업 아르템실(Artemsil) 소유의 대규모 소금 광산이 있다.
와그너그룹의 대규모 투입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군도 이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수개월간 격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 아닌 날씨였다. '기동성'으로 선전해오던 우크라이나군은 최근 언 땅이 녹아 진흙 웅덩이로 바뀌며 기민하게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와그너그룹은 바흐무트 동쪽과 북쪽에서 중앙을 향해 진격하며 우크라이나군을 압박했고, 우크라이나군은 바흐무트카 강 서쪽으로 후퇴했다.
바흐무트 전선의 우크라이나 부대 중 하나인 제3폭풍여단의 대대장 페트로 호르바텐코 중위는 WP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4시간 동안 최대 18명의 와그너 병사가 이곳의 참호 1곳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와그너에게는 '후퇴'라는 선택지가 없다. 그들이 생존할 유일한 기회는 계속 전진하는 것"이라며 "그리고 이 전술은 통하고 있으며, '좀비 전쟁'과 같다"고 덧붙였다.
최근 우크라이나군에게 붙잡힌 와그너그룹 병사도 "만약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퇴각한다면 '망치 처형'을 당한다"고 전했다.
망치 처형이란 와그너그룹이 탈영자를 처형할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지난해 우크라이나로 전향한 와그너그룹 병사가 망치로 살해되는 영상이 공개되며 충격을 줬다.
지난달 9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침공 속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바흐무트 전선의 작전실에서 병사들이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바흐무트에 와그너그룹 병사가 대규모로 투입됐을 뿐만 아니라 바흐무트에서 격전이 이어지며 우크라이나에게도 바흐무트가 '사기'와 '저항'의 상징이 된 만큼 양국은 당분간 치열한 싸움을 이어갈 것으로 관측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바흐무트를 방문했을 때 바흐무트를 '사기의 요새'라고 불렀으며, 우크라이나에서는 '바흐무트를 지키자(Bakhmut Holds)'는 슬로건까지 등장했다.
최근 몇 달간 전선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러시아에게도 바흐무트 점령은 상징적인 승리로 작용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러시아군이 크라마토르스크, 슬로뱐스크 등으로 전진할 길도 열린다.
슬로뱐스크는 돈바스 지역 최대 도심지역이자 2014년 친(親)러시아 분리 세력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돼 상징적 의미가 큰 곳이다. 크라마토르스크 역시 도네츠크 지역의 요충지로, 현재 우크라이나군 사령부가 있다. 이 두 도시를 점령한다면 러시아가 원하는 '돈바스 해방' 달성과도 한층 가까워진다.
다만 우크라이나가 춘계 공세를 위해 전략적인 후퇴를 선택할 수 있는 점, 와그너그룹 신병 모집이 사실상 중단돼 러시아군이 더 이상 인해전술을 이어 나가기 힘들다는 점 등 여러 가지 변수로 전황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서방 군사 분석가들은 우크라이나가 손실을 막고 재집결하기 위해 바흐무트에서 전술적 철수를 명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WP는 "(우크라이나군이) 몇 주 후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봄 캠페인을 위해 인력을 예비하는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며 전략적으로 후퇴하더라도 반격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WSJ는 "프리고진과 러시아 국방부와의 갈등은 와그너에 대한 수감자 모집이 중단됐음을 의미하며, 와그너그룹이 현재의 인해전술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한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프리고진은 러시아 국방부가 와그너그룹을 지원하지 않는다며 "와그너그룹이 바흐무트에서 후퇴한다면 전선 전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도 "러시아군이 여전히 느리고 점진적으로 전진하고 있기 때문에 곧 도시를 포위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