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한 실리콘밸리뱅크(SVB) 본사 가보니
8500명 직원 하루 아침에 일자리 잃어
예금 넣은 고객은 물론 실리콘밸리 생태계 전체에 타격
10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뱅크(SVB)가 폐쇄된 가운데 이날 SVB의 모회사인 SVB 파이낸셜 본사에서 일부 직원들이 빠져나오고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10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뱅크(SVB) 파이낸셜 본사. 굳게 잠겨 있는 출입문 앞에는 보도자료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SVB의 자산과 예금 전체를 인수해 새롭게 예금 인출 업무를 담당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출입문 오른편에는 SVB 각 지점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운영된다는 안내가 쓰여있었지만 이날 은행 폐쇄 지침으로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회사를 오가는 소수의 직원들은 말을 아꼈다. 이미 일부 직원들을 해고를 통보받아 출근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인원만 남은 대응을 위해 출근한 상태였다. ㄷ자형의 회사를 둘러 싸고 있는 주차장도 썰렁했다. 평소 같으면 야외 휴식 공간에 입주한 카페에 모여 삼삼오오 커피챗을 하거나 탁구 등 오락을 즐기던 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전 11시께가 되자 출입문이 열렸다. 서류 뭉치를 든 한 남자가 보안요원의 허가 하에 출입문에 들어섰다. 허리춤의 벨트 옆에는 연방 정부 공무원증이 걸려 있었다. 뒤따라 입장하려 하자 보안요원이 미리 약속된 경우가 아니면 입장할 수 없다며 막아섰다. 취재를 요청하자 대표 메일 주소만 알려줬다.
출입문 앞에는 기자처럼 서성거리는 이들도 일부 있었다. 자신을 이곳의 투자자라고 밝힌 이는 파산 소식에 상황을 보러 들렸다고 전했다. 그는 "분명 지난해까지만 해도 SVB 파이낸셜은 굉장히 탄탄한 곳이었는데 갑작스러운 파산 소식에 황망하고 당황스럽다"고 “앞으로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2009년과는 다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10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뱅크(SVB)가 폐쇄된 가운데 SVB 본사 출입문에 붙어 있는 보도자료.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팬데믹 붐 때 예금도 인원도 두 배 성장
SVB 파이낸셜은 스타트업을 주 고객으로 삼아 대출, 예금, 프라이빗 뱅킹 업무를 진행하면서 스타트업 생태계의 성장과 궤를 함께 했다. 특히 팬데믹 이후 투자 생태계가 호황을 보이며 예금 잔고가 2021년 한 해 동안만 86% 상승한 1892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 기간 직원 수도 급격히 늘었다. 2020년만 해도 직원 수는 4461명 수준이었으나 지난해 말 기준 8553명으로 두 배 규모로 성장했다. 이들 직원들은 SVB의 폐업으로 당장 실업 신세가 됐다. SVB의 예금 자산을 관리할 새 주체인 산타클라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BSC)은 이날 SVB 직원들에게 성명을 보내 “45일 간의 고용 기간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이 기간 동안 남아서 예금 업무를 진행할 직원들에게는 월급의 1.5배에 달하는 급여를 제공한다. 45일이 지나면 직원들은 급여와 보험, 취업 비자 혜택을 제공받을 수 없다.
10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뱅크(SVB)가 폐쇄된 가운데 일부 고객들이 굳게 닫힌 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3000곳 거래…400곳 위험 노출
SVB를 주요 자금 조달처로 삼았던 스타트업도 패닉에 빠졌다. 당장 예금 손실 외에도 연쇄적으로 생태계에 미칠 타격을 걱정하는 분위기다. 실리콘밸리의 대표 액셀러레이터인 YC 컴비네이터의 개리 탄 최고경영자(CEO)는 SVB와 거래를 트고 있는 회사가 3000곳에 달한다"며 “긴급 조사를 해본 결과 거의 400곳에 달하는 스타트업이 위험에 노출됐고 이중 100곳 이상은 당장 다음 달 직원들에게 줄 월급을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업 폐쇄 전날 무사히 돈을 인출한 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대표는 “운이 좋게 예금 잔액을 인출할 수 있었지만 인출을 못 한 이들도 있어 지금 우려가 크다”며 “당장 월급을 주지 못하는 곳들도 생길 것”이라고 전했다. 실리콘밸리 대표 벤처캐피털(VC)인 퍼스트마크 캐피털의 릭 하이츠만 창업자는 “지난 40년 간 스타트업 생태계의 기둥 역할을 했던 SVB가 36시간 안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며 “이런 상황도 가능한데 또 어떤 바닥이 예상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우려를 보였다. 13년 간 SVB에서 일했던 사미르 카지 얼로케이트 CEO는 “팬데믹 이후 늘어난 예금 잔액과 국채 수익률 하락으로 상황이 어려워진 가운데 스타트업의 패닉으로 인한 뱅크런이 이 같은 비극을 초래했다”며 “SVB는 40년 간 VC와 스타트업 생태계에 많은 일들을 했는데 몇 시간 만에 허무하게 사라진 것을 보면 슬프다”고 말했다.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