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원의 이유 있는 유럽
프랑스 정부 ‘정년 연장’ 움직임에
“저임금 노동자·여성, 최대 피해”
노동환경 나빠, 연금에도 불이익
“여성 임금 상승이 우선” 목소리
지난 7일 프랑스 파리에서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시위대가 프랑스 정부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지난 7일(현지시각) 프랑스 전역에서 정부 추산 128만명, 주최 쪽인 노동조합 추산 350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올해 여섯번째 시위였지만 역대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가 추진하는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 한국으로 치면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끈 촛불시위와 비슷하거나 좀 더 큰 규모다. 당시 촛불시위에 주최 쪽 추산 평균 80만여명이, 시민이 가장 많이 모였던 12월3일에는 전국에서 232만명이 광장으로 나왔다.
이날 시위에는 프랑스 8개 노조 외에도 대학생, 환경단체 등 여러 단위 조직들이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던 건 바로 여성주의, 페미니즘 단체다. 이마에 빨간 띠를 두른 여성들은 개사한 팝 음악을 따라 부르고 율동을 하며 신나게 행진했다. 이날 연금 개혁안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 목소리는 진지하고 엄숙했지만, 이들의 시위는 특별히 유쾌해 시위 참여자의 호응을 끌어냈다. 바로 다음날인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는데, 이날도 여성들은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이들이 외치는 핵심 구호에는 정년을 64살로 늦추려는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에 대한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 궁금해졌다. 프랑스 여성들이 연금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더 똘똘 뭉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들이 더 분노하는 까닭
“연금 개혁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저임금 노동자, 그리고 여성이다.”
<한겨레>가 직접 찾아간 파리 시위 현장에서 만난 시민 오란(28)이 말했다. 페미니즘 단체 무리에서 행진하던 그는 “임금 수준이 (남성에 비해) 낮은 여성은 연금 개혁의 직접적 피해를 본다”며 “노동자의 임금과 업무 환경의 질을 높이는 것이 정답”이라고 했다. 오란의 말을 듣고 찾아보니, 실제로 프랑스 여성들이 연금 개혁에 ‘더 펄쩍 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연금 개혁은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린 남녀 불평등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프랑스 통계청은 2019년 여성의 임금 소득이 남성보다 평균 22% 낮은 수준이라고 했다. 약 20년 전인 2000년(28%)보다 격차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차이가 크다. 대표적 이유 중 하나가 근무 시간의 차이다. 여성의 경우 자녀가 생기면 직장을 쉬거나 근무 시간을 줄일 가능성이 남성보다 높다. 통계청은 “2020년에는 일하는 여성이 파트타임(시간제) 근무를 할 확률이 남성보다 3배 더 높다(2008년에는 5배 더 높았다)”며 “여성은 고임금 일자리에 취업할 가능성이 낮고 저임금 기업, 업종에서 일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했다.
임금이 낮으면 향후 은퇴 뒤 받는 연금 수령액도 적을 수밖에 없다. 프랑스 여성이 정부의 연금 제도 개혁 방향에 관해 정년 연장 대신 여성의 임금 수준을 올려 연금 재정을 늘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프랑스 보건·사회 분야 통계 서비스 기관에 따르면, 2020년 프랑스에 거주하는 여성의 평균 연금은 월 1154유로(160만원)다. 남성이 1931유로를 받는 것과 견줘 약 40%나 적었다. 8년 전인 2012년 말 기준 프랑스 여성이 받은 연금은 월평균 967유로, 남성 1617유로다. 이때 역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연금을 약 40% 적게 받았는데 10년 새에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셈이다.
노동 가능 연령 때의 임금 격차는 고스란히 노년의 연금 격차,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연금을 100% 타기 위해 42년 동안 일해야 한다. 정부는 이번 연금 개혁으로 이를 43년으로 늘리려고 한다. 여성은 출산, 육아, 가족 돌봄 등을 이유로 시간제 노동을 남성보다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곧 경력단절로 이어진다. 시간제로 일하고 중간에 휴직까지 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연금을 다 받기 위해 더 오랜 세월 노동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프랑스 정부의 안대로 은퇴 연령이 2030년까지 현행 62살에서 64살로 늦춰지고, 100% 수급을 위한 기간까지 늘어난다면 남성보다 임금이 적고, 경력단절의 확률이 높은 여성의 경우 더 불이익을 받는다.
크리스티안 마르티 ‘자본이동에 대한 조세부과를 위한 시민운동협회’(Attac) 과학위원회 연구원은 프랑스 언론 <르 몽드>에 남녀 간 심각한 연금 불평등이 정년 연장(62살→64살), 납입 기간 연장(42년→43년)으로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그는 프랑스 연금자문위원회(COR)의 2020년 보고서를 인용해 “남성(10%)에 비해 여성(19%)은 67살에 도달해야 은퇴할 수 있다. 연금 납부 기간이 길어지면 이 불평등은 더 심화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만 그런 게 아니야
사실 남녀 임금 격차는 프랑스만의 일이 아니다. 2021년 기준 유럽연합(EU)에서 성별 임금 격차(남녀 시간당 평균 임금 차이)는 12.7%다. 이는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남성이 평균 1유로를 벌 때마다 여성은 83센트를 번다는 의미다. 2018년(14.4%)에 비하면 점점 나아지는 것 같지만 더 큰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 ‘성별 전체 소득 격차’를 보면 상황은 더 악화하고 있다. 이 수치는 △평균 시간당 수입 △월평균 급여를 받는 시간 △고용률 등 요인을 두루 고려하는데, 높은 교육 수준에 따라 더 많은 급여를 기대하는 여성만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그 결과 성별 임금 격차가 줄어드는 듯 보이는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다. 성별 전체 소득 격차는 2014년 31.1%에서 2018년 36.2%로 오히려 더 나빠졌다. 이는 노동 연령의 여성이 벌어들이는 평균 소득이 그들의 고용 상태와 무관하게 남성보다 36%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이는 프랑스의 사례처럼 은퇴 뒤 남녀가 받는 연금액 차이, 노년의 삶의 질로 이어진다. 유럽연합에서 2021년 성별 연금 격차는 27.1%포인트로 나타났다. 65살 이상 유럽 여성이 받는 평균 연금이 남성에 비해 4분의 1 이상 적다는 얘기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더 심각할 수 있다. 한국은 성별 임금 격차가 2021년 기준 31.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크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