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먼 JP모건 회장, 내부 경고에도 수억 달러 융통해줘”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 겸 최고경영자가 지난 2월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한 모습. 2005년부터 18년째 세계 최대 은행을 이끌어온 '월가 황제' 다이먼은 아동성범죄자 엡스타인 사건에 연루돼 법정 출석을 앞두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월가의 황제’로 불리며 20년 가까이 세계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를 이끌어온 제이미 다이먼(67) 회장이 위기에 몰렸다. 미국 대형 은행이 대거 몰락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이겨내고 최근 미국 은행의 연쇄 파산 사태 수습 과정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한 그는 악랄한 아동 성범죄자인 제프리 엡스타인과 연루된 의혹으로 법정에 서게 됐다. 뉴욕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였던 엡스타인은 1990년대부터 10대 소녀 수천 명을 꾀어 성 착취한 죄로 교도소 수감 중 201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다이먼이 오는 5월 뉴욕남부연방법원에 출석해 엡스타인의 성폭행·인신매매 수사 관련 증언을 할 예정”이라고 2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월가에선 다이먼이 엡스타인의 성범죄를 인지하고도 이익을 위해 거래를 끊지 않았다는 정황이 확인될 경우 물러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제프리 엡스타인이 지난 2017년 대형 아동성범죄 혐의로 구속수감될 때의 모습. 그는 2019년 맨해튼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 연합뉴스
다이먼의 엡스타인 연루 의혹은 위기마다 다이먼에게 의존해온 미 금융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2005년부터 JP모건을 이끌게 된 다이먼은 2008년 금융 위기 때 소방수로 나서 부실 주택 담보대출 상품에 투자했다 망한 베어스턴스와, 뉴욕 최대 소비은행인 체이스맨해튼 은행 등을 인수해 ‘JP모건체이스’라는 세계 최대 은행을 탄생시켰다. 이달 초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여파로 중소은행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이 뱅크런 위기에 내몰렸을 때 미 정부는 다시 다이먼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직접 다이먼에게 연락해 파산 위기에 몰린 퍼스트리퍼블릭은행에 은행들이 긴급 자금을 모아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고, 다이먼은 은행 11곳에서 300억달러를 모아 이 은행에 지원하기도 했다.
다이먼은 20대 시절 금융계 입문 당시 스승으로 여겼던 미 금융사의 거인 샌디 웨일 전 시티그룹 회장과 경쟁하던 관계에서 JP모건을 악착같이 키운 일화로도 유명하다. 다이먼은 웨일의 후계자로 여겨졌다가 시티그룹에서 축출된 뒤, 시티를 꺾기 위해 잇따라 은행 합병을 이뤄내며 월가의 왕좌(王座)에 극적으로 올랐다.
그의 영향력은 금융권 밖으로도 확대 중이었다. 지난 1월 월스트리트저널에 ‘서방은 미국의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는 제목으로, 미국이 중국·러시아에 맞서 군사·경제·외교·윤리 모든 면에서 힘을 행사해야 한다며 ‘21세기 마셜플랜’을 제시하는 기고를 한 바 있다. 당시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다이먼의 대선 출마설이 돌았다. 금융계를 넘어 정계에서도 막강한 그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월가의 현인(賢人)으로 추앙받던 그가 희대의 성 착취범 엡스타인과 연루돼 법정에 서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월가는 술렁이고 있다. JP모건은 엡스타인의 범죄가 가장 활발히 벌어졌던 1998~2013년 15년간 그의 성범죄 조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억달러를 융통해준 주거래은행이었다. 2013~2018년 엡스타인이 거래한 도이체방크와 함께 성착취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성범죄자 엡스타인이 카리브해의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소유했던 별장. 이곳에서 10대 소녀 수천명을 차례로 기거시키며 자신과 특급 고객들을 위한 성착취를 20여년간 이어온 것으로 알려져, 이 섬은 '로리타섬'이란 악명까지 얻었다. /미 연방검찰
엡스타인의 범죄 주 무대였던 카리브해의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의 검찰과 연방 법무부는 지난 1월 JP모건 수뇌부에 대한 소환 조사와 대배심 구성 요청서를 뉴욕 법원에 제출했다. 이 요청서에 검찰은 “JP모건은 엡스타인의 성범죄를 인지한 위기관리부서 등에서 ‘연방은행법에 걸릴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수차례 받고도, 엡스타인의 막강한 자금력과 인맥을 고려해 그의 범죄를 돕는 거래를 장기간 유지했다”며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건 최고 경영자뿐이며, 다이먼을 조사해야 한다”고 적었다.
엡스타인은 JP모건 계좌를 통해 수많은 10대 여성에게 꾸준히 돈을 송금했다. 이 계좌에서 소녀들을 유인한 모델 에이전시 운영비와 VIP 고객, 소녀들을 휴양지로 실어나를 전용기 유지 비용 등이 뭉텅이로 인출됐다. JP모건은 2008년 엡스타인이 성범죄 혐의가 드러나 첫 실형을 받았는데도 그와 거래를 끊지 않았다. 당시 글로벌 금융 위기로 월가가 초토화될 때여서 이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제임스 스테일리 전 바클레이스 CEO가 2018년 당시 런던 다우닝가의 총리관저에 도착하는 모습. 그는 이전 JP모건 자산관리 담당 간부로 일할 때 성범죄자 엡스타인과 1000통이 넘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성범죄 대상 소녀들의 정보를 공유, 직접 성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최근 피소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다이먼을 증인으로 부른 검찰은 ‘다이먼 검토(Dimon review)’라고 하는 증거물을 다수 확보했다고 알려졌다. 이는 엡스타인과 거래하기가 위험하다는 각종 보고가 수차례 올라갔음에도 다이먼이 은폐·묵살한 정황을 담고 있다고 알려진 문서들이다. JP모건은 다이먼이 엡스타인의 범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며 ‘다이먼 리뷰’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앞서 JP모건 자산 관리 분야 임원인 제임스 스탤리는 회사 이메일로 소녀들의 사진과 품평을 담은 메일 1200통을 엡스타인과 주고받은 것이 드러나 최근 피소됐다. JP모건에서 물러나 영국 바클레이스 CEO로 일했던 스탤리는 엡스타인 사건 조사가 시작되자 2021년 사퇴했다.
미국 뉴욕의 JP모건 체이스 본사 간판. /연합뉴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