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박미향의 요즘 어디 가 _ 우이도·도초도·비금도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는 곳
‘바람이 만든 모래언덕’ 우이도
‘팽나무·수국정원 꽃잔치’ 도초도
비금도 ‘하누넘해변’ 고요 그 자체
지난해 ‘팽나무 10리길’. 신안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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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박하경은 수업 시간에도 잠을 자거나 딴짓 하는 아이들로 교단에 서는 게 버겁다. ‘사라져 버리고 싶다.’ 그럴 때면 낯선 곳으로 당일치기 여행에 나선다. 여행에서 그는 뜻밖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무덤덤한 배려에 울컥하기도 하면서 삶과 관계에 애틋한 자신을 발견한다.
지난달 24일 공개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여행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얘기다. 드라마는 여행의 본질이 인스타그램용 사진 채집에 있지 않고 ‘생소한 곳에서 발견한 그 무엇’에 있음을 일깨워준다. 각자의 각별한 ‘그 무엇’을 발견하기 좋은 여행지는 어디일까. 박하경에게 머뭇거리지 않고 추천할 만한 곳은 어디일까.
‘천사의 섬’은 전남 신안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무려 1004개의 섬을 품고 있어서다. 개성이 강한 수많은 섬이 여행자를 맞는다. 그중에서도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다면’ 선뜻 배낭을 꾸릴 만한 섬 3개를 소개한다. 신안군 남부에 있는 우이도와 도초도, 비금도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 있는 하누넘해변. ‘하트해변’으로도 불린다.
80m 모래언덕 장관…차원 다른 바람
우이도 돈목해변 옆 산책길을 이용해 풍성사구에 오른 여행자가 반대편에 있는 성촌해변 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박미향 기자
“아마도 600만년 전에 생성된 사구(해안이나 사막에서 바람이 만든 모래언덕)일 겁니다. 정말 아름답죠.” 지난달 25일 박흥영(59) 신안군 돈목리 이장이 자랑에 나섰다. 목포시에서 65㎞ 떨어져 있는 우이도는 진리와 돈목리로 나뉜다. 섬의 면적은 10.7㎢. 거주민은 고작 217명(2022년 기준)인 작은 섬이다. 크기만 보자면 자랑할 만한 게 있을까 싶은데, 이장이 고불고불 난 돈목마을 길과 돈목해변을 지나 안내한 곳에 이르자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남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나미비아사막 같은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돈목해변 서쪽에 형성된 모래언덕 풍성사구는 고운 밀가루 수천톤을 쏟아부어 높이 세운 달콤한 카스텔라처럼 폭신하다. 북서풍, 동남풍 등 계절에 따라 부는 바람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이 사구는 높이가 80m, 폭이 50m로 국내 최대다. 경사도는 32~33도.
박 이장은 “1970~80년대만 해도 이 언덕 꼭대기에서 비료 포대를 깔고 모래 썰매를 타는 이가 많았다. 타고 내려가면 바로 돈목해변에 퐁 빠지니 그 재미가 끝내줬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무분별한 손길이 닿으면 닿을수록 사구는 훼손돼 보잘것없이 초라해졌다. “이제는 보존을 위해 모래 썰매는 금지됐고 언덕을 휘젓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대신 산책길로 올라와 구경하는 것은 가능하죠.”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서부사무소 관계자는 “2025년 12월31일까지 출입이 금지됐지만, 그해 말 보존 상태를 살펴서 개방할 수도 있다”고 한다. 나무말뚝이 돈목해변에서 사구로 이어지는 숲길을 안내한다. 걸으면 약 5~7분 걸리는 이 길에선 고사리, 삘기(띠풀) 등 모양도 색도 제각각인 식물들을 만나는데, 이 또한 슴슴한 재미를 선사한다.
언덕에 오르면 바람이 제일 먼저 인사한다.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고 등을 떠밀어도 두렵지 않다. 풍성사구 바람은 특별하기 때문이다. 빌딩 숲 바람과 다른 상쾌함이 이 바람의 본질이다.
돈목해변 옆에 난 산책길.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풍성사구를 구경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박미향 기자
풍성사구. 박미향 기자
모래밭 위에 얇은 비단을 펼쳐놓은 것 같은 돈목해변도 이에 질세라 제 모습을 자랑한다. 쓰르륵 철썩, 눈치챌 틈도 없이 파도가 밀려왔다가 사라진다. 쿠르릉 철썩철썩, 세차게 달려드는 동해의 파도와는 그 결이 다르다. 이장은 자랑을 덧붙인다. “해 질 녘 붉은 낙조는 우리나라 최고죠.” 그의 얘기가 설사 과장이라고 해도 서해 낙조가 아름답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소설가 김훈도 <라면을 끓이며>에서 서해 낙조를 예찬했다. “어둠이 포개지는 빛이 비스듬히 기울 때 풍경은 멀고 깊은 안쪽을 드러낸다.(...)물이 빠지면 붉은 석양의 조각들이 갯벌 위에 떨어져서 퍼덕거린다.”
이 섬엔 식당이 없다
우이도는 섬의 서쪽에 튀어나온 2개의 반도가 소의 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흑산도와 함께 모두 흑산도로 불렸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홍어와 얽힌 사연이 이 섬에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섬 포구 흔적이 남아 있는 진리 선창에는 성인 남자 1.5배 크기의 홍어 장수 문순득(1777~1847) 동상이 있다. 우이도 사람인 그는 1801년 흑산도 인근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일본 오키나와까지 밀려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간 뒤 돌아오려고 했으나 또 풍랑을 만나 필리핀에 닿는다. 다시 마카오·중국을 거쳐 돌아온 3년 2개월간의 긴 여정이었다. 살아 돌아온 문순득은 섬의 자랑이 됐다. 마침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정약전이 그에게 ‘천초’(세상에 나가 처음)란 이름을 지어주고 그의 경험담을 글로 남겼다. <표해시말>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록으로 담은 책이다. 유구(오키나와)와 여송(필리핀)의 문화와 풍속을 소상하게 기록한 <표해시말>은 당대 이곳의 112개 지역언어까지 담아 기록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순득의 5대손인 문종옥(68) 진리 이장은 “대대로 상인 집안사람인 문순득 할아버지는 표류하면서 외국 문화를 접하고, 기술을 익혀 우리나라에 적극적으로 전파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복원한 문순득 생가가 선착장에서 5분 거리에 있다.
문종옥 진리 이장이 홍어 장수 문순득 동상 앞에서 그의 일생을 설명하고 있다.
우이도 사람들은 경운기보다 작은 ‘관리기’를 타고 다닌다. 길의 폭이 3m로 좁아서다. 걷기 여행자에겐 천국이다. 이 섬엔 식당도 없다. 끼니는 20여개 조금 넘은 민박집(여름 1박에 약 6~8만원, 겨울엔 5~6만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민박집 식사지만, 맛집 못지않게 정갈하다. 민박집 주인이 직접 잡아서 내는 생선 요리와 채집한 자연산 두릅, 고사리, 취나물 무침 등은 일품이라고 한다.
이날 저녁 6시께 느슨한 섬 하루에 마침표를 찍으러 노을이 찾아왔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70대 부부 신환섭·나해화씨는 “40년간 서울 살다 15년 전 정착했다. 여행 왔다가 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절마다 넘쳐나는 실록과 산나물, 공기까지 너무 좋습니다.”
박하경이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느릿느릿 슬금슬금 다가오는 헐거운 섬의 하루일 게다.
자산어보·슈룹 촬영한 이곳
우이도의 하루를 감상하고 그날밤 배를 타고 도초도로 이동했다. 천사의 섬 이틀째인 지난 26일 오전 도초도 선착창에서 최향순 관광해설사를 만났다. 도초도·비금도의 수백년 역사까지 훤하게 꿰고 있는 그다.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54.5㎞ 거리에 있는 도초도는 면적이 55.45㎢, 거주민은 2439명(2022년 12월 기준)인 우이도보다는 큰 섬이다.
도초도 발매마을에 있는 영화 <자산어보>와 드라마 <슈룹> 촬영지.
그가 안내한 곳은 영화 <자산어보>(이준익 감독·2021)와 드라마 <슈룹>(tvN) 촬영지(도초면 발매리 1356)였다. 그는 “이준익 감독이 원래 흑산도에 초가집 세트장을 지으려고 했다”고 알려줬다. 마루가 뻥 뚫린 초가집은 섬 노을 감상하기 제격이다. <슈룹> 주인공 성남대군(문상민)과 윤청하(오예주)가 서로의 사랑을 처음 확인하며 입맞춤한 장소기도 하다. 언덕에 고즈넉하게 들어선 초가집에서 가만히 머물면 서해 섬들이 전해주는 바람의 노래가 들린다.
섬 바람이 부는 곳은 이곳만이 아니다. 도초면 지남리에 있는 수국정원 인근에 ‘팽나무 10리길’이 조성돼 있다. 팽나무 사이로 바람이 일렁인다. 길게 뻗은 길은 길이가 약 4㎞, 폭은 3m.
지난 1년간 전국에서 기증받은 70~100년생 팽나무 760그루가 소담스럽게 서 있다. 나무마다 달린 팻말에는 고향이 적혀있다. 나무 아래 수국, 수레국화, 석죽패랭이 등이 경쟁하듯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마쳤다. 최 해설사는 “6월 중순 수국이 활짝 피면 볼만하지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라고 자랑한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전날 만남에서 “5톤 트럭 740대를 동원했고, 새벽에 (팽나무를) 운송했다.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스프링클러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초도 명물로 유명한 ‘팽나무 10리길’. 6월 중순이 되면 수국이 활짝 펴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수국정원. 박미향 기자
팽나무 숲길에서 차로 2~3분 이동하자 2016년에 첫 삽을 뜬 수국정원의 자태가 드러났다. 오는 6월24일부터 7월3일까지 10일간 도초도 수국공원 일대에선 ‘섬 수국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15종 3만여그루가 심어진 수국정원은 마치 포르투갈 신트라에 있는 ‘신비의 정원’처럼 여행자의 호기심을 풍선처럼 부풀린다. 고불고불 난 산책길을 돌아서면 새로운 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금도와 연결된 서남문대교를 지나자 최 해설사가 한 첫 말은 ‘이세돌’이었다.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1승을 거둔 이세돌 9단의 고향이 비금도다. 2008년 ‘이세돌 바둑박물관’이 문을 열어 알파고와의 역사적인 한판승을 조형물로 재현해 여행자를 유혹한다.
‘이세돌 바둑박물관’ 초입에 설치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국 조형물.
대한민국 최초 민간 주도 개발 염전인 대동염전이 있는 비금도. 새가 날아가는 모양과 닮았다는 이름의 이 섬에는 도초도보다 많은 3478명(2022년 기준)이 산다. 면적은 51.72㎢. 최 해설사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다”며 하누넘해변과 명사십리해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누넘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는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포토존이다. “하누넘해변의 모양이 하트잖아요. 여기서 다들 사진 찍어요. 하누와 넘이의 사랑이란 뜻도 있고, ‘하늘 넘어’란 의미도 있지요.”
이 해변은 고요하다. 파도조차 무엇이 급했는지 사라진 듯하다. 명사십리해변도 적막하긴 마찬가지. 그 고요함이 숨 막힐 정도로 매력적이다. 박하경이 ‘멍 때리기’ 좋은 장소가 이만한 데가 있을까.
명사십리해변 앞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주민. 박미향 기자
“주민들이 저렇게 고기를 직접 잡기도 해요.” 최 해설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명사십리해변 한쪽 바다에는 물고기 잡는 데 여념이 없는 어부가 보였다. 수십개의 쇠말뚝을 일정한 간격으로 바다에 꽂고 그사이에 걸어둔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명사십리해변의 진풍경은 이것만이 아니다. 약 4.3㎞ 길이의 해변은 모래가 탄탄해서 자동차 질주가 가능하다.
우이도·도초도·비금도/글·사진 박미향 기자 [email protected]
그 섬에 가려면
우이도: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오전 11시40분 출발하는 우이도행 배를 이용하면 된다. 하루 한 편 운항하는 배가 오후 2시20분에 우이1구(진리), 오후 3시20분에 우이2구(돈목마을)에 도착한다. 도초도에서 우이도로 가는 배편은 하루 두번(아침 6시20분, 오후 2시)이며 우이1구까지 50분, 우이2구까지 1시간40분 걸린다.
도초도: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쾌속선(하루 4회, 50분), 목포 북항선착장에서 차도선(하루 3회, 약 2시간) 등을 이용하면 된다.
비금도행 배를 이용한 뒤 비금도에서 차량으로 서남문대교를 건너 도착할 수도 있다.
비금도: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쾌속선(50분), 목포 북항선착장에서 차도선(약 1시간40분)이 하루 세 차례 운항된다. 암태도 남강선착장에서 출발하는 차도선(약 40분)은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약 1시간마다 한 편씩 운항한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