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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없는 정치의 필연적 산물... 베를루스코니가 남긴 숙제
 

▲  지난 14일(현지시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밀라노 대성당 밖 광장에 모여 있다. 이날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됐으며, 공식 수용 인원인 1만 명을 넘는 약 1만 5천 명의 추모객이 광장을 메웠다.
ⓒ 연합뉴스


지난 12일 사망한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탈리아에 적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과 함께 풀기 쉽지 않은 숙제를 남겼다. 그가 남긴 영향력은 현재의 이탈리아 국민과 정치권에 국한될 수 있지만 차세대 이탈리아에 남긴 숙제는 향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베를루스코니를 이해하지 않고 현재의 이탈리아 정치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전 이탈리아의 정치를 이해하지 않고 베를루스코니를 이해할 수도 없다. 베를루스코니는 시민 없는 정치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시민이 없는 경제 번영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유한적인지 보여주는 민주주의 교육의 현장이 이탈리아였다. 

민주주의는 경쟁과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다수의 이념이 경쟁을 하고 시민은 그 가운데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때의 시민이란 리모컨을 든 시청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흥미를 잃으면 티브이를 꺼버리는 시청자 모드에서 개선은 보장되지 않는다. 시청자가 떠난 티브이에서도 흥미 없는 내용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관여는 필수적이다. 시민의 선택은 능동적이어야 하고 선택군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회피보다는 끝없이 대안을 요구해야 한다.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보일지라도 외면보다는 교체를 선택해야 한다. 정치는 살아있기 때문에 교체 위협을 느끼는 이상 결코 정체되지 않는다. 

물론 주기적 교체마저 관성의 학습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 이 역시 정치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권 내부의 카르텔을 감시하는 의무 역시 시민이 져야 한다. 이런 역할의 시민이 없는 민주주의는 거대한 선거 기계일 뿐이다. 제도적 장치는 있되 그 장치가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리고 정치는 점점 부패해 간다. 무기력한 기계의 몸통에 기생하는 곰팡이들처럼.

혹여 이 말들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그렇다면 이탈리아 정치를 들여다봐야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탈리아는 21년 독재자 무솔리니를 처형하고 왕정을 끝냈다. 1946년 공화국을 수립한 이탈리아는 무엇보다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야 하는 절박함에 놓이게 된다. 이때 국제적으로 큰 변수가 발생하는데, 바로 소련의 팽창주의였다. 

소련을 견제해야 하는 미국과 잿더미에서 일어서야 하는 유럽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탄생한 것이 마셜플랜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이 유럽 재건 계획에 따라 이탈리아 역시 총 12억 400만 달러(1조 5457억 원)의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게 된다. 이때 미국이 이탈리아에 제시한 원조의 조건은 공산주의를 국가 지배세력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탈리아의 온건 좌파 정당들은 이탈리아공산당과 철저한 거리를 두면서 기독교민주당이 주도하는 빅텐트 안으로 모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대연정과 함께 기독교민주당의 46년 지배가 시작됐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18명의 총리가 27차례 교체됐지만 집권당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변화의 격랑 앞에서 성장 멈춘 일본과 이탈리아
 

▲  지난 1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콜로료 몬제세의 미디어셋 본사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의 얼굴이 담긴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 연합뉴스


그렇다면 이렇게 장기 집권이 이어지는 동안 왜 이탈리아 국민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을까? 이탈리아는 전쟁 후부터 1990년대까지 40여 년 동안 무난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잿더미 속 패전국에서 주요 7개국(G7) 대열에 서기까지 이탈리아의 산업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국민들은 안정적 발전에 취해 점차 정치 변화의 필요성을 잊어갔다. 

그런데 같은 기간 다른 거대 산업국가들도 그랬을까? 이탈리아와 달리 당시 대부분의 거대 산업국들은 높은 경제 성장과 별개로 끊임없는 정치권력 교체를 이어갔다. 같은 기간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서는 다섯 차례, 프랑스에서는 네 차례 정권교체가 있었다. 내각제 국가 가운데 비교적 정권의 수명이 긴 독일에서도 두 차례 권력이 교체됐다.  

G7 국가 가운데 전쟁 이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정권교체가 단 한 차례도 없던 두 나라가 이탈리아와 일본이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같은 기간 훌륭한 경제 성장을 이룬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두 나라는 다른 경제 강국들과 달리 성장을 멈추고 만다. 왜 하필 이 두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990년대 초는 지구촌 곳곳에서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겪는 시대였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경제 이념이 영미권에서 자리 잡은 뒤 전 세계의 사회 기반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순발력이 모든 국가에 요구됐다. 

하지만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과 이탈리아는 1990년대 초 격랑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일본은 1993년 자민당 55년 체제가 무너졌지만 새로운 정치문화로 연결되는 데 실패하고 돌고 돌아 다시 자민당 일당체제로 돌아오고 만다. 더 불행한 것은 이들이 침체의 원인을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데서가 아닌 제국주의 영광을 잃어버린 데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는 신자유주의 출현에 대해 적응도 저항도 아닌 이해 자체를 하지 못했다. 흔히 1990년대 이전까지 기독교민주당 단일 집권기의 이탈리아 정치를 제1공화국으로, 그 이후를 2공화국이라 부른다. 헌법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구분하는 이유는 1990년대 초를 기해 기존 정치권이 완전히 붕괴했기 때문이다. 

1공화국의 반공 이념이 빅텐트로 작동하면서 수십 년간 그 안에서 무엇이든 가능하게 했다. 관료주의, 후견주의, 뇌물국가(Tangentopoli)로 대변되는 마피아와의 결탁 등 온갖 비리가 다 모인 당시 이탈리아 정치는 그야말로 정치병동(政治病棟)이었다. 물론 이탈리아 정치가 이 지경까지 이른 데에는 시민권 행사를 게을리한 유권자들의 책임도 컸다. 

신자유주의와 소련 붕괴라는 세기말 사건들을 겪으면서 1공화국의 정당들은 모두 무너졌다. 집권 대연정 정당들은 대대적 검찰 수사에 사법적으로 붕괴됐고, 만년 야당 이탈리아공산당은 소련의 몰락과 함께 이념적으로 붕괴됐다. 

새 정치적 토양 일궈야 하는 이탈리아 정치
 

▲  지난 1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의 '포르차 이탈리아'(Forza Italia, 전진 이탈리아) 당 본부에서 리치아 론줄리 상원의원, 안토니오 타자니 외무장관, 파올로 바렐리 하원 원내총무, 풀비오 마르투시엘로 유럽의회 의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포르차 이탈리아를 창당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딸 마리나 베를루스코니가 고인이 된 아버지의 정당에 대한 가족의 지지를 재차 강조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이런 어수선한 가운데 변화의 흐름을 가장 먼저 직감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였다. 다수의 민영 언론을 소유한 재벌이었던 그는 재빨리 신당을 창당하고 정치권에 뛰어든다. 이러한 동물적 본능이 그에게는 출세가도를 열어줬을지 몰라도 그의 조국 이탈리아에는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그가 읽어낸 변화의 키워드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는 영미 신자유주의였다. 이미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을 지배했던 신자유주의가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는 세계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는데, 베를루스코니는 이점을 일찍이 감지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범람은 사회문화적으로도 유럽 대륙의 고유문화 퇴색으로 이어졌다.  

베를루스코니즘의 두 번째 키워드는 반공주의. 새로울 것은 없었다. 이미 반공 이념은 수십 년 이탈리아 정치 문화 속에서 국민들의 무의식에 하나의 반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소련이 붕괴되면서 더 이상 현실적 지표도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제1공화국 정당들이 무너진 빈자리에 반공주의의 선점은 베를루스코니의 선명성으로 국민들에게 각인됐다. 

정치인 베를루스코니를 만드는 마지막 키워드는 정치혐오주의였다. 어떤 의미에서 베를루스코니즘의 가장 핵심적 전략이기도 하다. 제1공화국 정치인들의 타락에서 피로감을 느낀 시민들에게 모든 정치인을 부패한 인물들로 각인시키는 전형적 포퓰리즘 공식이다. 이미 이탈리아에서 1992년 이래 '마니 풀리테'(Mani pulite, 깨끗한 손) 운동 이후 '정치인=악, 관료=선' 공식이 상당히 먹히고 있었다.  

모든 정치권을 타락한 집단으로 내몰면서 관료, 기업가 등이 나타나 (또는 그들을 내세워) 일반 국민의 대표를 대체하려는 시도는 프랑스대혁명 직후부터 있었다. 국민들에게 정치 혐오감을 부추겨 외면하게 하고 그 자리를 관료, 기업인으로 메우려는 포퓰리즘을 유럽의 정치학자들은 극중주의라고 부른다.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심각한 도전이기도 하다.

전통 정치집단의 붕괴 후, 제2공화국에 들어선 이탈리아 정치는 이렇게 베를루스코니즘의 깊은 그늘에 여전히 놓여있다. 붕괴한 기존 정치세력의 빈자리에 정치혐오적 포퓰리즘(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이 등장하고 그가 물러난 자리에는 지역이기주의적 포퓰리즘(북부동맹, 오성운동)이 들어서고, 그들이 실패한 자리에 이제는 극우 포퓰리즘(조르자 멜로니)이 채워져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분명 이탈리아 정치의 거목이었다. 제2공화국은 그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이제 그가 떠난 이탈리아는 어떤 방식으로든 새 정치적 토양을 일궈야 한다. 그 거목을 퇴비로 삼을지 아니면 제거할지에 따라 이탈리아의 정치 토양은 달라질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 경제, 사회의 미래는 이 과제 앞에 서 있는 시민들의 역량에 달려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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