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로 함께 여행 떠나…호텔서 약물 탄 숙취제 먹여 살해
사망보험금 노리고 범행 계획…피해자 아버지는 충격으로 사망
ⓒ News1 DB
"당신 아들이 필리핀에서 사망했습니다."
2020년 1월17일 한밤중 B씨(40)의 아버지 C씨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국내 번호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번호였다.
C씨는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 혹시 몰라 외교부 등을 통해 보이스피싱인지 문의했다. 1시간 뒤 현지 영사로부터 온 전화에는 '아들이 사망한 게 맞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흘러나왔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던 전화는 B씨의 고등학교 동창 A씨(38)가 걸었던 것이었다. A씨는 사망 이틀 전 B씨와 단둘이 필리핀 보라카이로 여행을 떠났다.
유족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A씨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A씨는 B씨가 알코올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유족에게 설명했다. 당시 유족은 건강이 좋지 않아 보라카이에 갈 형편이 못 돼 A씨에게 아들 시신을 국내로 데려와 줄 수 있냐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런데 A씨는 대뜸 필리핀 현지에서 시신을 화장하겠다고 유족에게 제안했다. 유족은 무언가 속전속결로 해결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해외에 갈 수 없는 처지에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귀국한 A씨는 22일 부산역에서 유족을 만나자마자 화장 절차에 썼던 경비를 요구했다. 유족은 A씨에게 '감사하다'며 경비를 줬고, A씨와 함께 B씨가 살던 집을 잠시 찾았다.
이때 유족은 A씨가 망설임 없이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계속해서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는 행동에 A씨를 수상히 여기기 시작했다. 또 A씨는 평소 B씨에게 돈을 자주 빌려줬다며 채무를 갚으라는 요구도 했었다.
하지만 유족 측 지인 D씨가 평소 알던 보험설계사를 통해 B씨의 명의로 된 보험이 있는지 확인해 봤더니, 사망보험금 수익자에 A씨가 등재돼 있던 사실을 알게 됐다. 유족은 깊은 충격에 빠져 매일을 눈물로 지새웠다.
유족은 보험금 문제로 A씨와의 연락이 끊긴 후 이 사실을 경찰에 고소했다. 조사 결과 A씨는 보험설계사를 통해 B씨의 사망보험금 수익자를 자신으로 돌렸고, 1억9000만원~7억원의 보험금을 지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월 보험료는 무직 상태로 실업급여를 받고 있던 B씨가 냈다. 고등학교 동창 사이었지만 A씨는 그동안 사회적 유대 관계가 부족한 B씨에 대해 우월적인 지위를 가져 가능했던 일이었다.
A씨와 B씨 유족의 지인 D씨가 카카오톡으로 나눈 대화 내역. A씨가 자신에게 돈을 빌려간 B씨의 채무금 6000만원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조사 결과 6000만원의 돈을 빌려간 것은 A씨로 드러났다. (D씨 제공)
심지어 돈을 빌려준 쪽도 A씨가 아닌 B씨였다. 타투샵을 운영하던 A씨는 인테리어 공사비 및 생활비 명목으로 B씨로부터 6000만원을 빌렸던 게 조사에서 드러났다. A씨가 유족에게 했던 말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또 당시 B씨의 집에서 전기합선으로 화재가 발생했는데, A씨는 이것을 기회로 자신을 채권자로 하는 6000만원 상당의 허위 공정증서를 작성했다.
A씨는 화재 책임이 B씨에게 있기 때문에 공정증서를 만들어놔야 나중에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속였다. 평소 A씨는 자금난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B씨가 숨진 뒤 이 공정증서를 이용해 유족에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수사를 통해 허위 공정증서임이 드러나 소송을 취하했다. 또 보험회사에 B씨의 사망 보험금을 청구하기도 했다. A씨는 이 사건으로 사기미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사건의 모든 실체가 밝혀진 건 2년 뒤였다. 지난 1월 A씨는 수감 생활 도중 보험회사를 상대로 B씨의 사망 보험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는데, 이때쯤 검찰 조사에서 A씨가 보라카이 호텔에서 B씨를 살해한 사실이 드러났다.
A씨는 사망 당일 새벽까지 B씨와 함께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신 뒤 객실에 돌아와 간호사인 아내로부터 받은 향정신성의약품인 '졸피뎀'을 탄 숙취해소제를 B씨에게 마시게 했다. B씨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A씨가 끝내 질식시켜 살해했다.
애초 A씨가 사기미수죄로 실형을 받았을 때는 B씨의 사망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유족 지인 D씨가 지난 2년간 보험회사, 소방을 상대로 사건의 전말을 파헤쳤고, 이러한 노력에 추가 수사까지 더해져 범행을 밝힐 수 있었다.
D씨는 뉴스1에 "B씨의 부친이 사기미수죄 재판을 방청하다 충격에 쓰러졌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며 "수감 중에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에 소송을 낸 A씨는 오랜 친구인 B씨한테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렀다"고 분개했다.
현재 A씨는 강도살인 등 혐의로 재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보험계약 체결에 도움을 준 보험설계사도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B씨가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로 숨진 것"이라며 "숙취해소제에 약물을 넣지도 않았다"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부산=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