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녀’(2010)의 한 장면. 출처 다음 영화.
지난해 5월부터 이 칼럼을 연재하면서 종종 떠올린 영화가 있다. 임상수 감독의 2010년 작 '하녀'다.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가족들과 이 영화를 보았다. 생각보다 성적 장면의 수위가 높아 극장을 나서며 다들 머쓱해 했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한동안 농담 소재로 쓰였던 몇몇 대사나 야한 장면들과는 무관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100여 분짜리 영화에 딱 한 번 등장하는, 한 줄짜리 짧은 대사 때문이다.
다들 아는 것처럼,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의 리메이크인 이 작품은 원작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흘러간다. 감독 표현대로 '우아하게 잘 사는 가정에 묘한 하녀가 들어와 그 집 남자와 관계를 맺는 스토리'라는 얼개는 같되,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녀관계가 아니라 계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류층의 위선과 얼빠진 민낯을 보여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듯 제 자리를 지키는 지배 계급의 무서움을 함께 전달하는 게 목표다.
이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라는 걸출한 작품이 나온 만큼, 임상수 감독이 '하녀'와 '돈의 맛'(2012) 연작을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은 설명이 필요 없이 이해한다. 그럼에도 나는 '기생충'보다 '하녀'에 심정적으로 더 정이 간다. 그것이 더 낫거나, 더 현실적이거나, 더 바람직한 이야기라서가 아니다. 오직 현실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대사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이 영화 속 대사를 좋아한다. "나, 찍소리라도 좀 내야겠다고요!"
영화 ‘하녀’의 한 장면. 출처 다음 영화.
백치 같고 푼수 같은 여자, 맹하고 착한 하녀인 '은이'(전도연)는 주인집 남자 '훈'(이정재)의 아이를 밴다. 그러나 당사자보다 먼저 이를 알아차린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의 밀고로 은이는 결국 강제로 임신 중절 수술을 당한다.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병식은 은이가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들고 병실을 찾았다가 뺨을 맞는다. "아줌마, 나 복수할 거예요." 젊은 여자의 얼굴, 한때는 3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이었을 지 모를 결연한 표정을 보며 병식은 말한다. "그래…. 마음이야 굴뚝같겠지." 꿈이라도 맘껏 꾸라는, 위로를 가장한 체념에 은이가 반발하며 뱉는 게 바로 위에 소개한 내용이다.
전도연이 그렁한 눈으로 외치던 이 대사는 생각보다 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후속 장면에서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 등장하는, 가히 위악적이다시피 한 이미지 때문에 입은 외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자가 된 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자살 사건들, 특히 '사회적 타살' 같은 수식어가 붙는 사건을 접할 때마다 이게 누군가의 '찍소리'일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최근 서울 서이초등학교에서 세상을 떠난 20대 교사 사건을 보면서도 다시금 영화를 생각했다. 왜 누군가의 '찍소리'는 항상 목숨을 던지는 일이어야만 할까.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절실히 바란다. 그러려면 평소에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기자로서의 반성과 다짐은 너무 당연해 길게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연한 말은 줄이고, 동료 시민으로서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호소하고 싶다. 산 자의 투쟁은 죽은 자의 투쟁보다 가볍지 않다. 진정성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외통수에 놓인 이들에게 퍼지지 않길 바란다. 그러니 타인의 호소를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고 일축하기보다 함께 고민할 내 일로 여겼으면 좋겠다. 부디, 책임은 무한대로 부여하면서 악성 민원 방어 수단은 주지 않는 교육부와 학교 행정이 문제라는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기를 바랄 뿐이다.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