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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행인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도망치는 조선(33). 온라인 커뮤니티 화면 캡처

 

‘묻지마 칼부림’ 사건의 범인을 잡고 보니 조현병 환자거나 사이코패스였다는 건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지난달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흉기를 휘둘러 행인을 살해한 조선(33)은 검사 결과 사이코패스였다. 3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에서 흉기 난동을 부린 최원종(22)도 조현성 성격장애를 진단받은 병력이 있다.

흉악범들이 ‘사이코라서’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상당히 명쾌한 해석으로 들린다. 실제로 국내 한 연구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자 가운데 정신 병력이 있는 경우는 전체의 절반 수준으로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그런데 바꿔 말하면, 나머지 절반은 정신 병력이 없는 사람이란 얘기다. 이런 범죄들을 단지 정신질환에 의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의미다. 이들은 도대체 왜 흉기를 들고 무고한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향하는 걸까.
 

일명 ‘선진국형 범죄’…원인 연구 어려워

씁쓸한 표현이지만 묻지마 범죄는 선진국형 범죄로도 불린다. 정신질환자에 의한 소행뿐 아니라, 무한 경쟁 사회에서 낙오하고 고립된 개인의 열등감과 복수심이 계기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 같이 힘들게 살 때는 몰랐지만,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향이 크다.

국내에서 언론에 가장 처음 보도된 묻지마 살인은 1982년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이다. 당시 경남 의령군의 순경이었던 우 씨는 동거녀와 불화가 일자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와 수류탄을 꺼내 마을 주민 62명을 살해하고, 30명이 총상을 입었다. 그 이후 국내에선 묻지마 범죄가 간헐적으로 발생해 국내 범죄학계에선 많은 연구가 이뤄지진 않았다. 또 언론을 통해 ‘묻지마 범죄’로 명명됐으나, 학계에서는 ‘동기 없는 범죄’ ‘이상 동기 범죄’ ‘무차별 범죄’ 등으로 칭해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국내 칼부림 사건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총기 난사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미국도 상황은 엇비슷하다. 범인 상당수가 범행 직후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경찰에 사살당하는 경우가 많아 당사자의 심리 문제를 직접 조사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다른 범죄에 비해 발생 사례가 많지 않고, 범죄자를 직접 조사하기 힘들다는 특성 때문에 국내외 묻지마 범죄 관련 연구는 비교적 많지 않은 편이다.
 

‘묻지마 범죄’ 절반이 정신질환…나머지는?

지금까지 진행된 국내 연구에서는 범행의 가장 큰 원인으로 정신질환을 꼽는다. 다만 국내 묻지마 범죄는 아직 전수 조사와 통계관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모든 묻지마 범죄가 정신질환자의 소행이라고 보는 것은 치우친 시각이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2017년 펴낸 ‘동기 없는 범죄 수용자 재범 방지를 위한 치료적 개입 및 제도화 방안 연구’에는 전국 14개 교도소에 수감 된 묻지마 범죄자 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은 일면식 없는 이들에게 살인이나 폭행, 협박, 방화 등을 저지른 수감자들이다. 60명 중 정신 병력이 있는 경우는 46.7%(28명)였다. 묻지마 범죄의 절반 정도가 정신 질환자에 의해 일어난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의 피의자 최원종(22)은 자신이 오랫동안 스토킹을 당해왔다는 망상적 사고 특성을 보인다. 뉴시스

 

특히 조현병은 2011년까지는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던 질병으로, 망상·환각·환청 등이 주요 증상이다. 기이한 집착이나 편집증적 사고를 보이며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감청하고, 해하려 한다는 피해망상을 흔히 경험한다. 조현성 성격장애 병력이 있는 서현역 흉기 난동 피의자 최원종이 “나는 몇 년 동안 조직 스토킹의 피해자였고 범행 당일에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망상적 사고의 일환이다.
 

신림동 흉기 난동 피의자 조선(33)은 경찰 조사에서 “오래전부터 살인 욕구가 있었다” “내가 불행하니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한결기자 [email protected]

 

이에 비해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성 성격장애와 증상이 상당히 유사하다. 폭력성·충동성·공감 능력이나 죄책감 결여 등이 특징이다. 과시적이고 자기도취적 측면도 있다. 경찰에 잡힌 뒤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은 신림동 흉기 난동 피의자 조선이 범행 직후 보란 듯이 계단에 앉아 있었던 것도 이러한 과시적 성향을 드러낸 것이라는 게 여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묻지마 살인’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생물학적 요인
- 정신증(Psychosis), 우울증, 뇌의 이상, 성격장애

○심리적 요인
-자존감 문제, 자격지심, 반사회적 특성, 강박적 사고, 자기애적(과장적) 특성, 책임을 수용하지 못함, 세상이 거부적이며 무관심하다고 여김, 과거의 모욕에 대한 잦은 생각으로 인한 분노, 폭력적 복수에 대한 환상

○사회적 요인
- 사회적 고립, 왕따 경험, 스트레스(결혼생활 문제, 경제적 궁핍 등), 무기 접근이 쉬움

자료: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폭력을 자존감 회복 수단으로 삼아

그런데 연구의 조사 대상 60명 중 나머지 절반(53.3%)은 정신 병력이 없었다. 묻지마 범죄 수감자 상당수가 망상을 겪은 적이 없고(66.7%), 환각 증세도 없었다(75%). 오히려 이들은 직업이 없거나(66.7%), 배우자가 없었고(65%), 경제적 어려움(80%)이나 가정불화(55%)를 겪는 등 사회 경제적 문제가 컸다. 음주 문제(75%)나 전과(88.3%)가 있어 이런 어려움이 악순환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국내 여러 연구에서는 각각의 유형 분류명은 다르지만, 범죄자의 성격 특성에 따라 크게 △정신질환 △만성분노(반사회성) △현실불만(외톨이) 유형으로 나눈다. 앞서 연구의 묻지마 범죄자 60명은 ‘이상사고형(정신질환형)’ 29명, ‘현실불만형’ 20명, ‘전위보복형(만성분노형)’ 11명으로 각각 분류됐다. 정신질환과 그 외 원인이 반반 정도를 차지한 셈이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가정집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화가 나서 40대 부부를 살해한 ‘신정동 옥탑방’ 살인사건의 범인 윤모 씨(당시 33세). 동아일보 DB

 

만성분노형은 사회에 막연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어 공격적이고 반사회적이다. 평소에는 화를 드러내지 않다가 분노 조절에 실패하면 폭발적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의 ‘묻지마 범죄자 하위유형의 심리학적 특이성’ 연구에 따르면, 2010년 ‘신정동 옥탑방’ 살인 사건의 범인 윤모 씨(당시 33세)가 이에 해당한다. 윤 씨는 서울 양천구의 한 놀이터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을 마시던 중에 인근에 있는 한 옥탑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기분이 나빴다는 이유로 40대 부부를 흉기로 살해했다.

현실불만형은 대인관계에서 고립된 외톨이로, 매사에 불만이 있어서 타인과 갈등이 쉽게 발생한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남 탓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2010년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칼싸움 온라인 게임을 하다 졌다는 이유로 행인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박 모 씨(당시 23세)가 이런 유형에 속한다. 박 씨는 미국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유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12월 5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게임에 졌다는 이유로 행인을 흉기로 살해하고 도망치고 있는 박모 씨(당시 23세). 동아일보 DB

 

이들 대다수가 가족, 친구, 동료 등 대인관계에서 고립돼 피해의식과 열등감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생각이 타인과 소통을 통해 해소되지 못하고 자가 발전해 눈덩이처럼 커진 경우다. 40년 이상 폭력성과 관련한 범죄심리학 연구를 해 온 리처드 펠슨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범죄학(사회학)과 교수는 이같이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지면, 강한 공격성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물론 자존감이 낮다고 해서 모두가 공격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는 우울감을 느끼거나 움츠러드는 정반대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때 공격성을 느끼는 사람들은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자존감에 상처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보복을 해줘야 자존감이 다시 회복된다고 믿는다. 누군가를 공격해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목표를 이뤘다는 성취감을 느끼면서 무너진 자기 체면이 회복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일종의 열등감 극복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나는 피해자, 세상은 가해자”

그러면 왜 이들의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특정인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에게로 가는 걸까. 이들에게는 모든 잘못을 외부로 돌리고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외현화 사고가 강하게 작용한다. 정상적인 사람은 인생에서 뭔가 잘못됐을 때 자기 잘못을 반추해보는 사고가 발달해 있다. 반면 이들은 환경 탓, 사회 탓하는 사고가 비정상적으로 발달 돼 있기 때문이다. 이수정 교수는 “이들은 세상 전체가 가해자이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전혀 자기반성을 할 줄 모른다”며 “부모, 학교를 비롯해 세상 지위 높은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내가 이 지경이 됐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내 삶이 잘못된 것은 ‘세상 탓’이고, 이 세상을 구성하는 ‘아무나’가 가해자로 지목될 수 있다. 자신을 괴롭게 한 가해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공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인지적 합리화도 일어난다. 이 교수는 “(가정이나 학벌 등)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걸로 보이는 이들에게 열등감이 있어 세상 사람 누구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때 범죄자들은 자기가 공격하는 대상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살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20년 이상 법의학 분야에 몸담아 온 제임스 놀 미 뉴욕주립대 의대 정신과 교수는 관련 연구에서 “이들은 자기가 사회적으로 박해를 받거나 심하게 학대받았다고 믿고, 여기서 비롯된 분노와 적개심으로 움직인다”고 분석했다. 또 “자존감에 치명상을 입은 이들은 복수에 대한 환상을 가지면서 복수가 자신을 보호하는 마지막 피난처라고 여기게 된다”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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