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 헌법기구 설치' 개헌안 국민투표
호주 헌법 제정 당시 원주민은 '토착 동물'
원주민 자녀 빼앗아 백인 가정 보내기도
2018년 10월 영국의 해리 왕자(앞줄 왼쪽)가 호주 퀸즈랜드 프레이저 아일랜드에서 한 원주민과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호주 정부가 오는 10월 원주민들을 ‘온전한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원주민을 대변하는 헌법 기구를 설치하는 내용의 개헌에 찬성하는지를 묻는 게 핵심이다.
6만 년 이상 호주 대륙에 살아온 원주민은 전체 인구(2,600만 명)의 3.2%를 차지한다. 그러나 헌법상 국민의 범주엔 들지 않는다. 원주민을 국민으로 인정하는 캐나다, 뉴질랜드와는 대조적이다. 이번 개헌안이 통과되면 원주민은 1788년 영국계 이주민들이 호주를 건국한 지 235년 만에 처음으로 ‘국민’의 지위를 갖게 된다. 주요 외신들이 “역사적 투표”라고 표현한 이유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30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10월 14일, 원주민을 대변할 헌법 기구 ‘보이스’ 설립과 관련해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며 “호주인들은 호주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원주민 지위 향상은 지난해 집권한 앨버니지 총리의 공약이다.
헌법 제정 당시 원주민은 '토착 동물'
2018년 호주 멜버른에서 시민들이 14세 원주민 소년 사망을 둘러싼 법원 판결에 항의하며 거리 시위를 하고 있다. 멜버른=EPA 연합뉴스
영국이 호주 대륙을 식민지로 삼기 전부터 이 땅에 살았던 원주민들이 국민에서 배제된 건 가혹했던 ‘원주민 말살 정책’ 때문이다. 호주 헌법은 “영국이 주인 없는 땅에 국가를 세웠다”는 논리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원주민이 '땅의 주인'이 되면 안 됐으므로, 사람 아닌 ‘토착 동물의 부류’로 취급한 것이다. 헌법에서 원주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국민이 될 수 없었다.
당국은 원주민에게서 토지만 약탈한 게 아니다. 어린아이들도 빼앗았다. 1900년대 초반부터 70년간 ‘원주민 동화 정책’ 혹은 ‘문명화’ 명목으로 원주민 아이들을 강제로 백인 가정에 보냈다. 원주민 언어가 아닌 영어를 가르치는 등 서구식 교육으로 이들의 정체성을 박탈하려 했다.
물론 원주민의 투쟁 끝에 자그마한 진전도 이뤄냈다. 1967년 원주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개헌안에 유권자 90% 이상이 찬성하면서 참정권을 쟁취했다. 원주민 동화 정책 관련 법이 폐지됐고, 2008년엔 케빈 러드 당시 총리가 말살 정책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대변자’ 역할을 할 헌법 기구가 없었던 탓에 삶의 질은 개선되지 않았다. 원주민의 평균 수명은 호주인보다 7~8년 짧다. 자살률도 두 배 높다. 교육 기회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원주민 거주 지역에서 폭행 등 범죄 발생이 빈번해지면서, 호주 사회가 이들을 국민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개헌 문턱 높아... 통과 전망 밝진 않아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가 30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의 주도 애들레이드에서 개헌 투표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애들레이드=로이터 연합뉴스
여당은 개헌이 원주민 건강과 교육, 고용,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등 국가 통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야당은 “원주민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고 법적 불확실성을 초래한다”며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다.
개헌 문턱도 높다. 개헌안이 통과하려면 국민투표에서 투표자 과반이 찬성하고, 6개 주 가운데 4곳에서 과반 찬성이 나와야 하는 등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지금까지 호주에선 총 44회의 개헌 시도가 있었는데, 이 중 8건만 가결됐다.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