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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를 위안으로 삼는 가난한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 축구다. 그중에서도 단연 리오넬 메시다. 이탈리아의 나폴리가 33년 만에 리그 우승을 하면서 마라도나를 다시 한번 떠올렸지만 그래도 현존하는 최고의 선수는 메시임이 분명하다. 그는 축구에서 '인간계'가 아닌 '신계'에서도 호날두보다 더 위에 위치한다. 아르헨티나는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으로 FIFA 랭킹 공식 1위에도 올랐다. 1978년과 1986년에 이은 3번째 월드컵 우승이다.
역대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스쿼드 즉 선수 구성만 놓고 보면 우승 후보로 자주 거론됐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더 자주 표류했다. 여건을 보면 잘 살 거 같은데 그렇지 못하는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현재 암울한 경제에 절망한 아르헨티나 국민은 메시를 위안으로 삼는다. 축구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대신 어릴 적 즐겨 봤던 만화 얘기 하나 잠깐 해보려 한다. 이것도 아르헨티나 경제와 관련이 있다.
'엄마 찾아 삼만리' ⓒ왓챠
만화 '엄마 찾아 삼만리'의 목적지는?
'엄마 찾아 삼만리'는 일본에서 만든 유명 TV 시리즈다. '엄마 찾아 삼만리'는 한국판 제목이다. 소년 마르코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엄마를 찾아가는 줄거리다. 마르코의 출발지는 이탈리아 제노바이고, 목적지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다. 지금 생각하면 출발지와 목적지가 바뀐 게 아닌가 싶지만 19세기 말 상황을 그랬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말과 쇠고기 수출에 기반을 둔 낙농업 부국이었는데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이탈리아와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19세기 말 당시 돈과 사람이 모이는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팜파스'라는 광활하고 비옥한 토양은 곧 아르헨티나 경제의 상징이다. 한때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높았던 세계 5대 부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1·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켜 큰 혼란을 피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사이 교육과 복지에 많은 돈을 쏟아부었던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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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거지 나라' 된 아르헨티나
"나라 꼴이 수치스럽습니다. 절망적입니다. 평생 일했는데 이 풍요로운 땅에서
토마토나 피망도 못 구합니다. 나라가 망가졌습니다. '거지의 나라'가 됐습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카를로스 안드라다라는 시민이 현지 방송과 한 인터뷰 내용이다. 잘 나가던 세계 5대 부국은 그의 말대로 어쩌다 '거지의 나라'가 됐을까? 현재 경제 상황부터 알아보자.
9월 기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기준금리는 118%. 8월에 97%에서 118%로 올린 이후 두 달째 이어지고 있다. 살인적인 물가를 잡기 위한 특단의 조치인데 8월 연간 물가 상승률이 124%를 찍었다. 8월에만 12.4% 올라 1991년 이후 가장 급격한 월간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게 아니라 물가를 그냥 쫓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는듯하다.
빈곤율은 계속해서 올라 아르헨티나 국민 10명 가운데 4명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희망도 점점 희미해진다. JP모건은 아르헨티나의 올해 연말 물가 상승률이 190%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존 전망치 150%에서 40%포인트나 더 증가한 수치다. 1년에 물가가 거의 3배나 뛴다는 의미다. 한때 세계 5대 부국으로 불리던 아르헨티나가 2023년에 처한 상황이다.
물가가 치솟는 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코로나로 고통받는 자국민에게 각종 보조금과 복지 혜택을 늘렸고 세금까지 깎아줬다. 이를 위해 중앙은행은 돈을 찍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 부작용으로 아르헨티나 페소 가치는 급락에 급락을 거듭했고 물가는 치솟고 또 치솟았다.
장기적으로는 기후 변화의 영향도 있다. 세계 주요 곡물 수출국인데 60년 만에 최악의 가뭄까지 닥쳤다. 수출이 안 되니 당연히 미 달러 보유액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있는 달러도 소수의 부잣집 침대 밑에 깔려 있다고 한다. 이제 아르헨티나는 10번째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해 있다. 가장 최근 부도는 2020년에 있었다. 세계 투기 자본은 아르헨티나 부도에 '베팅'을 하고 있다. 투기 자본이 이끄니 10번째 부도는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이다.
좌 페론·우 비델라 ⓒ연합뉴스
단골 메뉴 "포퓰리즘 탓"
'왜?'라는 질문은 이어진다. 한때 5대 경제 부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모두 "좌파 포퓰리즘 탓"이라는 건 국내 언론에선 단골 메뉴다. 이 주장의 중심에는 페론주의가 있다. 1946~1955년까지, 그리고 1973~1974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후안 도밍고 페론에서 나온 이념과 정책 기조다. 그의 정책은 외국 자본 배제와 국유화, 복지 교육 확대 등으로 요약된다. 남미 특유의 좌파적 성향이 강하다는 건 분명하다. 페론 이후에도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집권 세력이 여러 차례 등장했으니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을 빼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다. 경제 실패의 책임을 모두 페론주의로 돌릴 수 있을까?
이보다 덜 알려졌지만, 큰 영향을 미쳤던 게 바로 잦은 쿠데타와 신자유주의의 창궐이다. 군부 출신 첫 대통령인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대표적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경제 몰락의 최대 원흉으로 지적받는다. (무자비한 인권 탄압 얘기는 여기서 일단 접어놓자) 그는 철저한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국영기업과 민간 회사들을 외국 자본에 헐값으로 매각하면서 아르헨티나 산업기반이 급속도로 붕괴됐다. 재기의 기반이 이때 대부분 사려졌고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나랏빚과 빈곤율, 그리고 물가가 모두 치솟는 결과가 반복되고 있다. 물가가 오르고 일자리는 잃고 결국 많은 빈민이 발생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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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하려고 해도 이미 '발판' 팔아버린 아르헨티나
결론적으로 현재 아르헨티나가 '왜? 이 꼴이 났는지' 설명하는 건 어느 하나로는 부족하다. 비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농업을 기반으로 한 1차 산업 중심의 한계
- 외국 자본에 주요 산업 시설을 팔아넘긴 신자유주의
- '부조리' 해결 기대에 못 미쳤던 페론주의 한계
- "빵을 달라"는 국민 분노를 악용한 군부의 잦은 쿠데타
원인은 복합적이고 역사도 길다. 그만큼 국내 문제가 복잡하니 아르헨티나는 그 해법을 밖에서 찾으려는 듯하다. 최근 브라질에 이어 중국 돈 위안화 결제 확대를 공식화한 것이다. 미국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았다는 다른 남미 국가들과 생각을 같이하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론 아르헨티나 현대사에 드리워진 미국으로부터의 탈피 시도를 의미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또한 부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책'이 될 거 같지는 않다. 적어도 현재로선 그렇다. 재기할 수 있는 경제 기반은 과거 신자유주의가 활개 칠 때 대부분 아르헨티나 손을 떠났기 때문이다.
Y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