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5차 중동전쟁? 해묵은 원한 1~4차 전쟁 어땠길래

by 민들레 posted Oct 09, 202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제1차 중동전쟁 발발
석유, 운하 노린 강대국 개입에 복잡한 양상 전개돼
제4차 중동전쟁 승리로 이스라엘 요충지 확보
이후 1·2차 인티파다, 가자 대공습 등 분쟁 지속돼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중동전쟁의 역사도 시작됐다. 중동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외에도 석유 자원과 운하 지배권을 노린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이 개입해 복잡한 양상을 띠며 전개됐다.

재1차 중동전쟁은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한 직후 이에 반발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시작됐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함께 이스라엘은 독립국이 됐지만 영국군이 철수한 바로 다음날 이집트 전투기가 이스라엘을 폭격했다. 이스라엘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20일 넘게 버티며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1948년 6월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시작됐다. 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으로 힘을 키운 뒤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승리를 거뒀다. 그 결과 1949년 2월에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도 불린다.

수에즈 전쟁으로도 불리는 제2차 중동전쟁은 1956년 7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네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1952년 7월 쿠테타로 국왕을 쫓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나세르 대통령은 1956년 수에즈 운하 회사와 운하통행료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가 공군을 동원해 수에즈를 폭격했고 이스라엘도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침공했다. 3국 연한군은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반도를 점령했지만 세계 대전으로 번질 위험성에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가해 11월 유엔 총회에서 정전안이 채택됐다. 이후 시나이 반도에는 유엔긴급군이 투입됐고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즉각 철수했다. 아랍권에서는 이 전쟁을 삼국 침략이라고도 부른다.

1967년에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 해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전 전쟁의 패배를 복수하고 아렵권의 결속 강화를 노린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해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했다. 6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전쟁이 개시됐고, 이후 전쟁은 시리아와 요르단으로 확대됐다.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의 전면전에서 이스라엘은 공군기로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해 전투기 300대를 파괴하고 이후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전투기도 416대 파괴해 우위를 점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점령하고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과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격했다. 6월 유엔 안보리는 즉시 정전을 결의했고, 쌍방 수락에 의해 정전이 실현됐다. 제 3차 중동전쟁은 6일만에 끝나서 6일 전쟁이라고 불린다.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비롯한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게 됐다.

제4차 중동전쟁은 1973년 10월 이집트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시작됐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축제일인 욤키푸르(사죄의 날)에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됐다. 시리아 역시 소련제 무기를 앞세워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승리가 눈앞이었으나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대적으로 지원하며 전황이 역전됐다. 미국은 30일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비행 수송작전을 통해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반격에 나선 이스라엘은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집중포격했다. 골란 고원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 군 탱크 867대와 차량 3000대 이상을 파괴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는 크고 작은 분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87년에는 순찰 중이던 이스라엘군 차량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치어 숨지게 한 사고로 제1차 인티파다가 촉발됐다. 이스라엘의 차별정책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불만이 폭발해 요르단강 서안 등 이스라엘 점령지의 민중 주도도 발생한 저항 운동인 제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진행됐다.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 방법을 모색한 합의로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 출범의 계기가 됐다.

2000년 9월에는 제2차 인티파다가 발생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야당(리쿠드당) 지도자이던 아리엘 샤론 총리가 무슬림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도발적으로 방문하면서 시작된 제2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의 강경 진압으로 유혈충돌로 확산됐다. 그 결과 오슬로 평화협정도 파기됐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다시 점령하게 됐다.

2008년에 12월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최소화한다는 명목으로 가자지구를 공습했다. 이듬해 1월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했고 하마스 측도 휴전을 선언하며 끝나게 공습은 끝났다.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