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북부 중국 인접 국경도시 보텐
주로 중국 돈 사용, 월급도 위안화로
일대일로로 중국인 대거 몰린 까닭
9일 라오스 북부 도시 보텐 전경. 보텐=허경주 특파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창한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가 올해 시행 10년을 맞았다. 중국 서부에서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육상 실크로드(일대)와 중국 남부에서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일로)를 구축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초대형 경제벨트를 만든다는 것이 시 주석의 구상이었다.
중국은 패권 국가로 등극해 '중국몽'을 실현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국가들은 경제 성장 수혜를 입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프로젝트 참여국들을 연결하는 인프라 건설 협력을 위해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 152개국에 1조 달러(약 1,355조 원)를 빌려줬다.
중국의 약속은 실현됐을까. 한국일보는 이달 7~9일 라오스를 찾아 일대일로가 지난 10년간 남긴 빛과 그늘을 되짚어 봤다. 라오스는 일대일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나라로, 일대일로 철도의 첫 정거장으로 낙점돼 천지개벽한 도시 보텐과 수도 비엔티안을 둘러봤다.
8일 라오스 보텐의 한 중국 식당에서 업무를 끝낸 중국인 노동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보텐=허경주 특파원
“우린 낍(라오스 화폐) 안 받아요. 중국 위안화 없어요?”
8일 비엔티안에서 북쪽으로 400㎞ 떨어져 있는 보텐. 식당 주인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중국어로 물었다. 200위안을 건네자 위안화로 거스름돈을 주면서 “요즘 낍이 통하는 곳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보텐은 작은 중국이었다. 중국 윈난성 모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라지만, 라오스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내 중심가에는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중국 식당이 즐비했고 식당 메뉴판엔 중국어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중국 맥주를 마시며 중국어로 대화했다.
보텐은 중국 일대일로가 참여 국가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송정근 기자
유령도시에서 일대일로 관문으로
9일 라오스 북부 도시 보텐의 한 식당 앞에 한자로 메뉴가 적혀 있다. 가격 역시 중국 위안화로 표시돼 있다. 보텐=허경주 특파원
보텐은 2000년대까지 환락의 도시로 불렸다. 교통이 불편한데도 외국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살인, 폭력, 마약, 성매매 등 범죄가 급증하자 라오스 정부는 2011년 카지노를 폐쇄하고 전기를 끊었다.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던 보텐은 순식간에 유령 도시가 됐다.
보텐의 운명이 바뀐 건 2015년 중국 쿤밍에서 동남아로 연결되는 ‘일대일로 철도’의 라오스 내 첫 번째 정거장으로 낙점되면서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라오스를 거쳐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까지 닿는 철길을 연결한 뒤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양까지 도달한다는 게 중국의 구상이었다.
현재 라오스 비엔티안까지만 연결됐지만, 구상이 실현되면 보텐은 중국 14억 인구와 동남아시아 6억 인구를 연결하는 일대일로의 관문이 된다.
9일 라오스 북부 보텐의 경제특구 홍보사무소에 중국 일대일로와 철도 실크로드를 소개하는 사진이 나타나 있다. 보텐=허경주 특파원
인력부터 자재까지 모두 중국에서
보텐은 인프라 건설 공사로 들썩였다. 중국 남서부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을 잇는 물류 허브 역할을 할 특별경제구역(SEZ)으로도 지정되면서 중국에서 자본, 장비, 노동력이 끊임없이 유입됐다.
8일 보텐에선 고층 건물들이 여기저기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철도는 일찌감치 완성돼 올해 4월(여객열차 기준·화물은 2021년 12월)부터 운행을 시작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년 넘게 중단됐던 경제특구 건설 공사가 올해 초에야 다시 재개됐기 때문이다.
9일 라오스 보텐에서 중국 회사가 시공을 맡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보텐=허경주 특파원
건설 현장에 내걸린 시공사 이름도, 들려오는 말도 온통 중국어였다. 현장 관계자는 “관리직부터 기술자까지 핵심 업무는 중국 회사에서 파견된 중국인이 맡고, 라오스인들은 그 밑에서 각종 궂은일을 담당한다”고 설명했다.
건축 자재 역시 중국에서 넘어온다. 보텐 외곽 중국-라오스 육로 국경 인근에선 중국 남부 푸젠성과 윈난성 번호판을 단 대형 트럭이 쉴 새 없이 자재를 날랐다. 노동자들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머물며 중국 식당을 가고 위안화를 쓴다. 마트의 담배, 생수도 중국산이었다.
인프라 투자·개발을 통해 현지 경제를 부흥시킨다는 게 일대일로의 취지이지만, 노동력부터 크고 작은 물품까지 중국을 거치지 않는 게 거의 없는 셈이다. 일대일로 참여국은 토지만 제공하고 개발 이득은 대부분 중국이 취하고 있다는 얘기다.
8일 라오스 보텐에서 중국 국영 트럭업체 시노트럭(中国重汔)이 건설 자재를 싣고 세관으로 들어오고 있다. 보텐=허경주 특파원
“국내 건설·유통·노동 시장 개척에 한계를 느낀 중국이 해외 시장을 손쉽게 개척하는 통로로 일대일로를 활용하는 셈”이라는 냉소가 나오는 이유다. 오에이선 싱가포르 국제문제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중국은 프로젝트에 속도를 내야 한다”면서 “현지 노동자 채용이나 현지 물품 사용에 소극적”이라며 “수혜국의 일자리 창출이나 기술 이전, 경제 활성화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월급도 위안화로, “경쟁 심화돼”
‘돈 냄새’를 맡은 중국인들이 보텐으로 몰려들며 중국화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중국 사업가들이 현지인들에게 월급을 위안화로 주면서 경제적 종속 관계가 심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8일 라오스 보텐의 한 중국 식당에서 사장 민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올 초 중국 우한에서 왔다. 보텐=허경주 특파원
후베이성 우한 출신으로, 올해 초 보텐에서 중국 식당을 개업한 민(60)은 “중국에서 돈을 벌기 쉽지 않던 터에 이곳 소식을 듣게 됐다”며 “손님들이 꽤 있어 생활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라오스인 직원 5명을 두고 있다.
‘중국 바람’을 온몸으로 겪는 보텐 주민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중국인들을 상대로 운수업을 하는 우팃(24)은 유창한 중국어로 “중국 돈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할 일도 생기고 예전보다 먹고살 만해졌다. 이제 보텐에선 '찐'(중국을 의미하는 라오스어)이 없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중국인들과의 교제를 꿈꾸는 바람에 나처럼 가진 게 없는 라오스 남자는 연애도 쉽지 않다"고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9일 라오스 보텐의 건설 현장에서 라오스 청년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보텐=허경주 특파원
”다른 나라 지나친 의존 우려”
중국 자본(차이나 머니)은 라오스 곳곳에 손길을 뻗었다. 비엔티안은 2015년 전후로 중국 자본이 대거 유입되며 스카이라인이 바뀌었을 정도다. 중국 자본으로 지은 대형 쇼핑몰에는 중국 국영 완성차 그룹 둥펑자동차, 중국 정보기술(IT) 기업 화웨이와 전자제품 제조업체 샤오미, 중국 최대 전기스쿠터 브랜드 야디(YADEA) 등이 줄줄이 입점해 있었다.
중국어를 배우려는 열기도 뜨거웠다. 비엔티안에서 중국어 학원을 운영 중인 자우지아오롱은 “중국 자본이 대거 들어오면서 비엔티안의 중국어 학원이 핫팟(중국식 샤부샤부) 식당만큼이나 흔해졌다”고 말했다.
8일 라오스 비엔티안의 대표 관광지 빠뚜싸이(개선문) 앞에 중국의 자금 원조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서 있다. 비엔티안=허경주 특파원
비엔티안의 대표 관광지 빠뚜싸이(개선문)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차이나에이드(ChinaAid·중국 원조)’ 표지석은 중국 자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됐다. 중국은 2020년 12월 라오스 정부수립일을 맞아 우정의 징표로 8,750만 위안(약 162억 원)을 지원했고, 라오스 정부는 이 돈으로 개선문 인근 정화 작업을 했다. 빠뚜싸이는 라오스가 1949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상징물인데, 그 앞에 라오스가 이제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는 징표가 놓인 셈이다.
중국 자본 힘이 강해질수록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진다. 최근 라오스 정부는 라오스로 도피한 중국 인권운동가들을 중국으로 적극적으로 송환해 중국 정부의 민주인사 탄압에 힘을 보탰다.
통신회사에 다니는 싱캄(40)은 “통신업계에도 중국발 프로젝트가 많은데 중국이 돈을 주니 중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잦다"며 “다른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7일 중국 자본으로 건설된 라오스 비엔티안의 한 대형 쇼핑몰에 중국 전기 오토바이 업체의 스쿠터들이 전시돼 있다. 비엔티안=허경주 특파원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