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을 여행하려면 상당한 비용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항공료, 숙박비, 식비는 물론이고 뉴욕 전역을 걸어돌아다니지 않는다면 교통비 부담도 만만치 않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버스나 전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신용카드를 이용하거나 메트로카드를 이용할 경우 2달러 90센트가 듭니다. 현재 환율로 우리 돈 4천 원쯤 됩니다. 메트로 카드 등을 사지 않고, 1회권으로 전철을 타려면 3달러 25센트를 내야 하고, 5개 자치구 사이를 오가는 급행버스(Express bus)를 이용하는 요금은 7달러가 넘습니다.
뉴욕 시민이 만일 버스만 타고 다닌다면 왕복에 8천 원, 한 달이면 16만 원 넘게 들어갑니다. 물론 한국의 경우 경기도에서 서울로 오가려면 이에 못지 않은 비용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뉴욕시에서의 왕복 8천 원은 한두 정거장만 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내야 합니다.
이 비용이 뉴욕 저소득층에는 상당한 부담입니다. 저소득층의 20%가 비싼 교통비 탓에 병원 진료를 포기하고, 취업을 포기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뉴욕 시가 시작한 실험이 있습니다. 요금을 내지 않는 '공짜 버스'입니다.
뉴욕 맨해튼 북부 지역에서 전광판에 요금 무료(FARE FREE)라고 표시된 버스가 다가오고 있다.
뉴욕 시는 맨해튼과 브롱스, 브루클린 등 5개 자치구로 나뉘어지는데 각 자치구에서 저소득층이 많이 다니는 곳을 중심으로 각 한 개 노선을 골라 요금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올해 9월부터 시작했고 내년 3월에 끝납니다. 뉴욕 시 주민이든 관광객이든 요금을 내지 않고 그냥 타면 됩니다.
취재진이 만난 공짜 버스 승객은 "매일 노인 센터를 오가는데 공짜 버스가 많은 도움이 된다. 쇼핑도 더 자주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료 버스 승객들이 짐을 잔뜩 안은 채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이 실험의 첫 번째 목적은 저소득층의 이동 편의성을 높이자는 거지만, 다른 목표도 있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줄었던 대중교통 이용자를 늘리고, 더 크게는 대중 교통 서비스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뉴욕 시에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연 소득 3만 달러 이하일 경우 요금을 절반만 낼 수 있습니다. 공정한 요금(FAIR FARE)라는 제도입니다. 뉴욕시 인구 약 850만 명 가운데 30만 명 이상이 이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짜 버스' 실험을 시작한 건 저소득층 지원만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짜 버스'가 어떻게 대중교통의 서비스 질을 높이게 되는 걸까요?
뉴욕시 버스는 느리기로 유명합니다. 길이 좁고, 신호등은 많고, 무단횡단도 많다 보니 커다란 버스가, 특히나 두 개가 연결된 굴절버스는 더더욱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요금을 내는 방식도 신용카드 등으로 찍는다면 그나마 간편하지만, 교통카드를 기계에 넣었다 빼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요금을 운전 기사가 일일이 확인해야 하다 보니 앞문으로만 탈 수 있고, 뒷문으로는 내려야 합니다.
요금을 내지 않게 되면 이런 모든 과정이 달라집니다. 먼저 요금을 내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냥 타면 됩니다. 요금을 확인할 필요가 없으니 앞문으로 타든 뒷문으로 타든 상관 없습니다. 타고 내리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버스가 더 빨라집니다.
운전 기사와 싸울 일도 줄어듭니다.. 뉴욕 시에선 운전 기사와 승객이 다투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 가운데 30% 이상이 요금 문제입니다. 또 버스 이용자가 많아지면 승객들이 그만큼 안전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미국 전역에서 무료 대중교통을 운영하고 있는 20여 개 도시 가운데 큰 도시에 속하는 보스턴의 경우 버스가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23% 줄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물론 난 대중교통을 타지 않는데 왜 공짜 버스에 내 세금이 쓰여야 하느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짜 버스를 추진하는 쪽에선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라고 말합니다. 저소득층은 소득이 적다 보니 쓸 곳이 줄어든다고 그 돈을 저축하기는 힘듭니다.. 그 돈은 결국 생필품 구입 등 다른 데 소비하게 됩니다. 병원 진료를 자주 받으면 사회적 비용도 줄어듭니다. 전체 경제로는 남는 장사라는 겁니다.
요금은 원래 2달러 90센트. 카드 인식기에 요금 무료라고 표시돼 있다.
전면 무료 버스가 시행 중인 캔자스시티 조사에선 버스 이용자의 80% 이상이 병원 진료나 생필품 구입이 늘었다고 답했습니다.
기후 변화가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환경 측면에서도 좋습니다. 만일 뉴욕 시민이 자기 차량으로 출퇴근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면 배출되는 온실 가스가 41%까지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런 혜택이 모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돌아간다는 게 무료 버스 추진 측의 설명입니다.
더 멀리는 소방, 경찰, 교육은 무료인데 대중교통이라고 무료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무료 버스 사업을 비용 측면에서 보자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이번 실험도 당초 10개 노선으로 추진하다가 절반으로 감축됐습니다. 뉴욕 시에서 전면 무료버스를 시행하려면 9억 달러 가량 들어간다고, 이 실험을 처음 추진한 뉴욕시의원 조란 맘다니는 추산했습니다. 우리 돈으로 1조 원이 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뉴욕시 1년 예산이 300조 원이 넘는데 왜 이 사업이 불가능한 것이냐고.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그리고 기후 변화가 심각해지면서 대중교통 이용을 늘리려는 노력인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독일의 월 49유로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권이나, 우리나라 서울의 기후동행카드 등이 그 예입니다.
예산에는 항상 제약이 있습니다. 쓸 곳은 많고, 쓸 돈은 적습니다. 하지만 그 쓸 곳을 잘 정하는 게 정책 담당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우선 순위에 따라 우리 삶은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