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과몰입인생사' 캡처
최지우가 故 앙드레김의 성정을 회상했다.
25일 방송된 SBS '과몰입 인생사'에서는 인생 텔러 최지우가 대한민국 최초 남성 디자이너 앙드레김의 인생을 설명했다.
오드리 헵번의 팬이었던 앙드레김은 영화 '파리의 연인'을 보고 감명 받았고 지방시라는 남자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의상 디자이너라는 꿈을 꾸게 됐다.
앙드레김은 최경자 디자이너에게 일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갔다. 그 이후 최경자 의상실에서 일하게 된 앙드레김은 남자 모델로 일하기도 했다.
의상디자이너로서의 한계에 부딪힌 앙드레김은 프랑스 대사관을 찾아가 직원들에게 프랑스 패션 잡지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매일 아침 대사관을 찾아간 앙드레김에게 직원들이 잡지를 구해줬다.
앙드레김은 "친하게 지내던 프랑스 외교관 분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세계인들이 부르기 편한 이름을 만드는 게 어떻겠냐며 이름을 추천해주셨다"고 앙드레김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 이유를 밝혔다.
앙드레김은 자신의 이름을 건 의상실을 냈지만 남성 디자이너를 부담스러워한 여성 고객들이 의상실을 찾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망하기 직전까지 가자 앙드레김은 여성 고객을 사로잡기 위해 커피 무료 제공 VIP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시 짜장면이 40원, 커피가 30원이었으니 커피는 고가의 식품이었다. 커피 서비스에 반한 엄앵란이 결혼식에 앙드레김의 웨딩드레스를 선택했고, 이후 스타 마케팅으로 앙드레김의 위상이 높아졌다.
앙드레김 패션쇼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최지우는 "제 큰 키가 장점이라고 딱히 생각하지 못할 때다. 앙드레김 선생님이 제 외형에 대해 칭찬을 정말 많이 해주셨다. 여배우 자존감을 끌어올려주셨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앙드레김은 TV를 여러 대 틀어놓고 스타들을 직접 발굴했다. 당시 무명 단역 배우를 패션쇼 모델에 세웠고, 그 배우가 바로 원빈이었다. 이외에도 박보영, 소이현, 지성, 권상우 등 다양한 스타들이 앙드레김에게 선택돼 패션쇼에 서게 됐다. 앙드레김 패션쇼는 스타 등용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앙드레김이 프랑스 파리로 진출하게 됐다. 앙드레김은 우리나라 전통의상을 기반으로 옷을 만들어 한국의 미를 제대로 선보였다. 현지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이어 미국에서 러브콜을 받은 앙드레김은 '패션 외교'를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1994년 이집트는 북한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한국과 수교할 수 없었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건강이 악화되며 영부인이 실세가 됐다. 앙드레김에게 패션쇼로 영부인을 사로잡으라는 특별미션이 주어졌다. 앙드레김이 영부인에게 패션쇼 초대장을 보내자 영부인이 승낙했다.
그러나 패션쇼 당일, 영부인이 감기에 걸려 불참했다. 이에 앙드레김은 패션쇼 수익금을 영부인 재단에 전부 기부했다. 영부인은 미안함과 고마움에 다음 패션쇼에 참석해 1시간 30분을 꽉 채워 관람했다고 한다.
앙드레김이 이루어낸 것은 단순한 패션쇼가 아니었다. 민간외교였다. 이집트가 북한과의 약속을 깨고 한국과 수교를 맺게 됐다. 패션 외교로 유명해진 앙드레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앙드레 김의 날'을 두 번이나 선포했고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훈장을 받았다.
마이클잭슨은 생전 마지막 공식석상에서도 앙드레김의 의상을 입었을 정도로 앙드레김 의상을 좋아했다. 마이클잭슨이 앙드레김에게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앙드레김은 "나는 한국의 디자이너다. 한 사람을 위한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앙드레김은 옷 로비 사건으로 청문회에 끌려가면서 일생일대의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친숙함을 선사했고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는 앙드레김에 대한 신뢰도 높아졌다.
사망 4개월 전까지 패션쇼를 열며 열정적으로 산 앙드레김은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 힘들어도 꿈을 꿔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일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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