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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난 프랑스 농민들의 봉기 "농민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농업 정책에 항의하는 프랑스 농민들이 24일(현지시간) 부르주 인근 르베에서 고속도로를 점거한 채 차량 시위를 벌이고 있다. 프랑스 농민들은 정부의 비도로용 경유에 대한 면세 폐지와 수입 감소 등에 항의하며 실력 행사에 나섰다.
ⓒ 연합뉴스


 
1월 초부터 유럽 전역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동쪽에서부터 불이 붙었다. 루마니아, 폴란드,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지난주에는 프랑스 농민들이 이 움직임에 합류했다.

끓어오르던 용암을 넘치게 한 마지막 한 방울은 농업용 경유 가격의 인상이었지만, 수천수만 명의 농민이 트랙터를 몰고 고속도로를 점거하게 한 분노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농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도록 압박해온 유럽연합(EU)의 일방적 정책에 맞서 결사항전을 택했다.  

농민 인구가 밀집된 남쪽에서 시작된 봉기는 순식간에 프랑스 전역으로 번졌다. 불과 1주일 만에 80개 지역(총 100개)의 농민들이 수십 개의 고속도로를 트랙터로 점령하고, 도로 한편에 캠프를 지어 함께 숙식하며,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파괴했다. 트랙터를 몰고 마을을 다니며 시청, 경찰서, 은행에 오물을 투척하는가 하면 18%의 농민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현실을 반영하려는 듯, 대형 쇼핑몰에 들어가 돈을 내지 않고 가득 채운 카트를 밀고 나와 버리는 집단행동도 했다.

이들의 투쟁 방식은 여러모로 5년 전 반정부 시위대 '노란 조끼'를 연상시킨다. 항거에 나선 농민들은 한두 푼의 지원금이 아니라, 농업을 통해 당당히 생을 누릴 수 있는 근본적 조건을 정부가 제시하길 원한다. 구체적인 해결책이 나오기 전까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에 가득 차 있다.

농업 강국 프랑스 농민들이 자살하는 이유
 

▲  25일(현지시간)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의 지롱드주 청사 앞에서 열린 시위에서 농민들이 분뇨를 쏟고 있다. 프랑스의 농업단체들은 과도한 금융 비용과 환경 보호 규정, 불충분한 농산물 가격 등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정부의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유럽 최대 농업국인 프랑스의 농업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0.75%에 불과하다. 40년 전에 비하면 1/4로 줄어든 숫자다. 하지만 국토의 절반이 농지인 데다 온화한 기후 조건을 가진 탓에, 식량 자급률은 130%를 넘어서고 서유럽 농수산물 생산의 18%를 차지한다. 2차 대전의 잿더미 위에서 정부의 강력한 지원 속에 농업 강국을 건설했던 농민들이 이틀에 한 명꼴로 자살하고 1/5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끝에 거리에 나서 싸우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 번째는 자유무역협정이다. 지난 20년 동안 EU는 수많은 나라들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왔다. 그 대부분의 나라들은 유럽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농약이나 호르몬제 등을 사용해 오염된 농축산물을 대량 생산하고,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비용을 낮춰 저렴한 농산물을 제공한다. 어떤 사회적 논의도 없이 EU가 일방적으로 주도해 온 이 자유무역협정들은 질 낮고 값싼 농산물이 수입되는 길을 활짝 열었다.

그런 가운데 EU는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목표로 하는 그린딜(Green Deal)을 채택하고 각 부분에 다양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EU가 제공하는 연 90억 유로에 달하는 공동농업정책(CAP)의 지원 혜택을 받으려면 농부들은 이 규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이를테면 점진적으로 생산량을 감소시켜야 하므로, 휴경지를 4%에서 최대 10%까지로 늘여야 하고, 비료나 농약 사용, 축사 설치 등에서도 엄격한 규정들을 준수해야 한다.  

탄소 배출을 단계적으로 줄이고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은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부터 오염된 농수산물을 들여와 소비자들 앞에서 경쟁하게 만들면서, 자국 농민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친환경적인 노력을 강요하는 것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  "농민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동영상 갈무리


EU와 자유무역 기본 협정을 맺고 프랑스 정부의 비준을 앞두고 있는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남미 4개국)의 경우를 보자. 프랑스에선 철저히 금지되어 있으나 브라질에선 사용되고 있는 농약과 성장 촉진 호르몬 등이 51개나 된다. 유럽에선 금지되어 있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다국적 기업 소유의 농지에서 대단위로 재배되고 있기도 하다. 

수입 농산물과 자국 농산물에 적용되는 이중 잣대의 모순을 시정하지 않는다면, 30년 후 EU가 다다르게 되는 지점은 탄소 배출 총량 0이 아니라, 식량 주권이 사라진 땅을 가득 채우는 오염된 수입 농산물일 것이라는 것이 농민들의 판단이다.

또한 농축산물가공업계와 유통업계가 취하는 마진이 점점 커지면서 농부들의 몫은 끝없이 축소되는 것도 이들이 농업을 포기하고 싶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난 2~3년간 지속된 살인적 인플레의 핵심 원인은 대기업들이 과도하게 취한 이윤이라는 분석이 이미 나온 바 있다. 

대기업들이 저지르는 행패를, EU가 계속 지르고 다니는 자유무역협정을 아무 생각 없이 수락만 해온 정부를 향해, 농민들은 이제 국민을 위해 일해줄 것을, 국가가 공적인 힘을 발휘해서 농민 소득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좌우 성향의 모든 농민단체가 참가한 이번 농민 투쟁에서 좌파 성향인 농민동맹(Confédération Paysanne)은 ▲ 자유무역협정의 전면 폐지 ▲ 농수산물 가격 원가 이하 지불 금지 법안 채택을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걸었다. 우파성향의 농민단체(FNSEA, JA)가 ▲ 농민들의 수입 개선 ▲ 행정 절차 간소화 ▲ 그린딜 규정의 현실화 ▲ 농업용 경유 면세 유지 등의 구체적 요구에 집중하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농민동맹 대변인은 "물론 행정 절차나 그린딜 규정에 부적절한 것들이 많이 시정되어야 마땅하나, 시위에 참여하는 농민 대다수는 환경과 기후 문제를 부정하거나 우리의 빈약한 사회적 권리를 더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존엄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압도적 지지 여론, 이어지는 연대
 

▲  25일(현지시간)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의 지롱드주 청사 앞에서 열린 농민시위에서 한 시위자가 불타는 건초더미 옆을 지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프랑스 일간지 <피가로>에 따르면, 이번 농민들의 봉기는 국민 89%의 지지를 받고 있다. 처음부터 격한 모습으로 시작된 이들의 행동에 국민적 지지가 모이는 것은 농민들의 주장이 옳을 뿐 아니라,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어야만 시민들이 건강한 먹거리를 꾸준히 공급받고 식량 주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농민들에게 요구되는 농작물 재배 기준을 수입 농산물에도 똑같이 요구해야 한다'는데 정치 성향과 세대를 막론하고 시민 94%가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겨울 추위를 뚫고 나온 농민들의 절규는 팬데믹 이후 이어진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 속에서 경제적 불안을 겪고 있는 대다수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들의 투쟁이 곧 우리 모두의 투쟁이며, 그들의 승리는 모두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많은 시민들이 믿는 분위기다. 프랑스공산당 파비앙 루셀 대표는 농민들의 투쟁을 100% 지지하고 정부를 향한 모든 분노가 집결되어야 할 것이라 밝혔다. 그의 말대로 화물차 노조에 이어 어민과 택시노조가 연대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이 연일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를 뒤흔드는 농민들의 저항에 모두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난 가운데, 정치권에서도 활발하게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굴종하지 않는 프랑스'당 프랑수아 뤼팡 의원은 "자유 무역의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공장을 외국으로 쫓아냈던 정부가 이제는 농업을 우리 땅에서 뿌리 뽑으려 하는 것이냐"고 정부를 향해 꾸짖으며 프랑스가 자유무역협정에서 '문화적 예외'를 주장해 프랑스 영화산업을 비롯 다른 나라들도 자국 문화를 지킬 수 있는 원칙을 관철시켰듯 농업에 있어서도 '농업적 예외'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어나라 프랑스'당 뒤뽕 애냥 의원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최대한 지역 농산물을 소비하는 것'이라며 환경 보호를 목표로 내세우면서 반생태적, 반윤리적인 자유 무역을 부추기는 이중적 태도의 EU 집행부를 맹비난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 극대화에 봉사하는 EU를 탈퇴해 전쟁 직후 드골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식량주권, 환경주권, 경제주권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찾자고 제안했다.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된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여러 농민 단체 대표들을 총리실에서 차례로 만나 논의했지만 아직 해법은 나오지 않았다. 좌우 농민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답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U가 모든 회원국에게 같은 씨앗을 뿌려왔기에 유럽 동시다발 농민 저항이라는 열매를 거두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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