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 침대로 왔다, 내 차례였다”…日 자니즈 성추행 폭로한 가우안 인터뷰

by 민들레 posted Feb 0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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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의 성폭력을 폭로한 자니스 출신 가수 가우안 오카모토. /AP연합뉴스


‘자니 기타가와’(본명 기타가와 히로무, 1931~2019)는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문화 권력 그 자체였다. 2019년 사망한 그의 고별식은 도쿄돔에서 열렸고 추모객 8만8000명이 모였다. 아베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조전(弔電)을 보냈다. 1962년에 자니가 창업한 자니즈 사무소는 일본 최대 대중음악 기획사였다. ‘자니즈 소속 아이돌 없이는 일본 어떤 방송사도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2012~2016년 기타가와 전 사장에게서 15~20회 정도 성적인 피해를 당했습니다. 처음 성추행 당했을 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졸업식하기 직전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습니다.”

자니의 신화는 이 한 마디에 무너졌다. 작년 4월에 도쿄에서 자니즈 사무소의 소속 가수였던 오카모토 가우안 씨가 외국인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사실 자니 기타가와의 소속사 가수 성추행 문제는 일본 연예계에선 다들 한번쯤 들어본 이야기라고 했다. 피해자가 소송을 건 사례도 있었다. 1964년엔 ‘자니가 연습생을 성학대했다’는 증언이, 2003년엔 도쿄 법원이 자니의 성학대 일부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가십’만 나오면 물어뜯는 일본 방송사들은 전혀 자니 기타가와의 성추행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자니즈 사무소란 일본 언론이 대중문화 권력의 눈치를 봤다는 지적도 많고 상당히 타당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일본의 한 방송국 기자는 “자니의 성추행을 다들 뒤에서만 말하고, 누구도 실명으로 나서지 않아, 보도의 위험이 너무 컸던 것도 일본 언론의 보도가 거의 없었던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카모토 가우안 씨는 작년 4월 실명으로 외국 기자들 앞에 섰다. 오카모토 가우안 씨는 다르다. 자니즈 소속 시절에도 꽤 잘 나가던 가수였고, 일본 대중도 그의 이름과 얼굴을 적지 않게 인지할 정도의 유명인이다.

일본의 방송·신문사는 이때부터 자니의 성추행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 여론은 자니의 성추행 비판으로 돌아섰다. 결국 ‘자니즈 사무소’는 몰락했고 사명을 바꿨다. 일부 방송사는 자니즈 소속 가수의 출연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여론이 돌아선 것은 아니다. 작년 10월에는 ‘자니즈 성 폭력 문제 모임’에 소속된 40대 남성이 자살했다. 이 남성은 작년 5월에 실명을 밝히고 성피해 사실을 알렸다가, 인터넷에서 “돈 벌려고 이제와서 폭로한다”는 비방에 시달렸다. 숨진 남성이 가족에 남긴 유서에는 “정말 미안해. 00(아이 이름)가 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자니즈 문제 탓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과 분노가 되살아났어. 사회악을 없애는데 피해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렇게 폭로했어. 하지만 과거 기억이 되살아나, 더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워.”라고 썼다.

조선일보는 작년 10월 오카모토 가우안 씨를 만났다. 가우안 씨는 도쿄에 있는 ‘일본외국인특파원협회 건물’을 인터뷰 장소로 지정했다. 가우안 씨는 여전히 해외는 물론이고 자국 언론과 접촉을 조심하고 있다. 인터뷰에선 ‘자니 기타가와는 나쁜 사람’이란 식의 발언은 전혀 하지 않았다. 가우안 씨는 일본계 브라질인 4세다. 부모가 일본 귀국했을 때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성추행을 당한 게 중3때였다.

“성추행당한 날은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2012년 3월이다. 다른 자니즈 주니어 멤버들(우리로 치면 연습생)과 함께 기숙사에서 합숙했다. 그날 저녁 식사 끝나고, 자니 씨가 내 어깨를 주무르면서 ‘가우안, 오늘은 일찍 자면 안돼’라고 말했다. 다른 멤버들은 ‘오늘은 가우안이네’라는 분위기였다. 그날, 침대 3개가 있는 방에서 잤다. 같은 방에는 다른 멤버도 자고 있었다. 자니 씨가 내 침대로 들어오더니, 이불을 걷어냈다.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의 손이 발을 마사지하다가 점점 위로 올라왔다. ‘마사지만 하겠지’ 했는데, 팬티 위에서 만지더니, 벗겼다. 그때 각오했다. 다음날 아침, 자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인사했다. 같이 밖으로 나가면서 조그맣게 접은 1만엔 지폐를 줬다. 그렇게 약 15~20회 가량 성추행을 당했다.”
 

반세기 넘게 일본 ‘자니즈 사무소’란 최대 연예 기획사를 이끌면서 'J팝의 역사'로 불렸던 고(故) 자니 기타가와(본명 기타가와 히로무·1931~2019). 스스로를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려 사진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기네스북에 오를 당시 찍힌 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된 유일한 사진으로 꼽힌다.

 


-작년 4월 실명으로 성추행을 폭로했다. 가족들이 놀랐을 것이다.

“지금도 부모님하곤 이 이야기는 안 한다. 어머니는 나의 성적 피해 이야기를 듣기 원하지 않을 것이다. 들으면 기절할 정도로 힘들 것이다. 주변에서 어머니가 꽤 험한 이야기를 들은 걸로 안다. 아이치현에 사는데, 지인에게서 어머니가 매우 힘들어한다는 말을 들었다. 비방은 나한테도 끊임없이 온다. ‘거짓말한다’ ‘이제와서 폭로하는 진짜 이유가 뭐냐’는 식이다.”

-폭로할 때 비방과 같은 2차 피해를 각오했었나.

“어쩔 수 없다. 하지만 40대·50대 지인들은 ‘잘했다. 역사를 바꿨다’고 응원한다. (자니의 성추행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소문으로 모두 알고 있었지만, 증명되지 않은 도시전설 같은 것이었다. 내가 실명으로 증명해서 고맙다고 한다.”

-동년배인 20대에선 비방이 적지 않나.

“나는 술도, 담배도 안 한다. 클럽도 안 좋아한다. 평화, 용서, 사랑 이런 단어를 좋아한다. 20대하곤 얘기해도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난 15살 때부터 연예계 생활했고 16세부터 혼자 살았다. 나는 40~50대 분들이 좋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분들이다. 인생이 뭔지 아는 분들이다.”

“15살 때부터 사람들의 어두운 부분을 많이 보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뭔지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내 팬들도 40~60대가 많다. 20대한테는 내 얘기를 이해해달라고 강요해봐야 전달이 안 된다. 처음에는 이해해주길 기대했지만 지금은 내버려둔다. 언젠가 알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설과 같은 인물의 치부를 폭로했다. 일본에서 가수 활동이 가능한가.

“활동하기 쉽다곤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예 활동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명 폭로 전에 내 인생이 바닥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한계였다. ‘이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공황 장애도 겪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마지막에 뭘 못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결국 그동안 나는 나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처럼 익명을 택하지 않고, 왜 실명 폭로를 결심했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일본 여론에서) 미움을 받아도 좋으니까, 마지막으로 자니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그때 영국 BBC가 (자니의 성추행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전부 말하자, 이 일과 마주하자’고 결심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서다. 어디서 말할 것인가, 고민할 때 ‘일본외국인특파원협회’였다”

-외국인특파원협회에서 폭로 기자회견을 했다. 일본 언론을 못 믿은 건가.

“외국인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하자는) 이야기가 왔다. 이유는 일본 언론은 다루지 않으니 외국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하자는 얘기였다. 솔직히 BBC가 다큐 방송했는데도 일본에선 인터넷 뉴스로도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특히 (일본) TV는 절대 다루지 않는다. 혹시나, 해외 언론 앞에서 기자회견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마음이었다. 외국인특파원협회 측에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면 가겠다’고 했다. 그 다음은 아시는 그대로다. 기자회견하고 단숨에 수천만명이 이 사건을 알게 됐다.”

-본래 1999년에 주간지인 슈칸분슌이 자니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보도를 했다. 당시에도 다른 일본 언론은 전혀 안 다뤘다.

“당시 일본 언론이 제대로 보도했다면, (중학생이었던) 나는 자니즈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도 그곳에 안 넣었을 것이다.”

-쟈니즈사무소는 잘못을 사과했고 사명도 바꿨다. 붕괴 직전이다.

“자니즈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아니다. 나도 자니즈 사무소가 없어지는건 슬프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모교 같은 곳이니까. 교장선생님이 성희롱했다고 모교 자체가 없어졌으면 하는 것은 아니다. 교장 선생님이 성 가해자인건, 학교 선생님들도 소문으로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학교에서 보낸 시간, 문화제나 수업, 친구, 그리고 나의 청춘은 사라지지 않는다. 똑같은 것이다. 학교가 사라지는건 다른 얘기다. 물론 법률적으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자니 기타가와) 본인은 사망했고 이제 없다. 그런데도 학교를 무너뜨려야한다는데는 나도 찬성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네가 쟈니즈를 망쳤다’고 비방하는데, 나조차도 그런 지적에는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