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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은퇴 후 지역 데뷔에 어려움을 겪는 일본 단카이 세대의 모습에서 회사나 조직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지는 않겠다는 요즘 젊은 세대의 현명함을 느낄 수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 ‘2025년 문제’, 고령화하는 일본 사회

지난 주에 한국에 여행 온 일본인 친구들을 만났다. “한국의 거리는 일본보다 젊고 활기가 넘친다”는 말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 높은 물가와 경기 침체 등으로 한국 사회에 예전만큼의 생기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이 그렇게 느낄 만도 하다.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5%를 넘으면 ‘초고령화 사회’라고 정의하는데, 일본은 이미 2007년에 초고령화사회에 들어섰다. 지난해에 공표된 전체 인구 대비 고령자 비율은 29%. 이미 국민 3명 중 1명이 고령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도 빠르게 고령자 비율이 늘고 있다지만, 전체 인구 대비 비율은 아직 20% 미만이다. 현재 한국의 출생률이 세계 최저 수준이라고 한다. 어쩌면 곧 한국이 일본보다 더 ‘늙은’ 나라가 될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한국이 일본보다는 조금은 ‘젊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고령화 사회와 관련해 ‘2025년 문제’가 거론되어 왔다. 2025년이 고령화와 관련한 문제의 상징적인 기폭점으로 여겨졌던 배경에는, 패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 이른바 ‘단카이 세대(団塊世代)’가 있다. 1947~1949년 3년 동안 매년 260여만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이 기간에 태어난 인구가 800만이 넘는다. ‘단카이’는 우리말로 ‘덩어리’를 뜻한다. 즉, 800만여명에 달하는 이 거대한 인구 집단이 큼직한 덩어리가 되어 성큼성큼 일본 사회를 끌어왔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세대는 1960~1970년대 고도경제 성장 때에 청소년기를 보냈고, 1980년에는 샐러리맨으로서 ‘버블경제’의 풍요로움을 누렸다. 1990년대에는 버블 붕괴의 직격탄을 맞기도 했지만, 일본의 고도 소비 사회를 구축한 주역이라는 점은 불변이다.

◇ 단카이 세대와 ‘회사 인간’의 탄생

2025년에는 바로 이 단카이 세대가 대부분 75세를 넘어선다. 일본에서는 65~74세를 ‘전기 고령자’, 75세 이후를 ‘후기 고령자’로 구분해서 별도로 의료와 돌봄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단카이 세대가 대거 후기 고령자로 진입하는 2025년 이후에는, 의료, 복지, 돌봄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인구가 훌쩍 늘어난다. 초고령화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바야흐로 본격화하리라는 것이다. 사실 굳이 2025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일본에서는 지난해에 75세 이상 후기고령자 인구가 2,000만 명에 육박했고, 평균 연령은 49세를 넘어섰다. 일본은 이미 젊은이보다 늙은이가 많은 사회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1980년대에 30대를 보낸 단카이 세대만 해도, 남성이 바깥일을 하고 여성이 전업주부로 집안일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육아와 남편 뒷바라지에서 ‘졸업’한 단카이 세대의 여성도 사연이 많지만, 이번에는 정년 퇴직한 단카이 세대 샐러리맨(대부분이 고학력 남성)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일본의 샐러리맨들은 근면하기로 소문난 일벌레다. 일본에는 ‘회사인간(会社人間,일본어로는 ‘가이샤닌겐’)’ 혹은 ‘일인간(仕事人間, 일본어로는 ‘시고토닌겐’)’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기만의 취미도 없고 사적인 인간 관계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오로지 회사일에만 열심인 샐러리맨을 뜻한다. 요즘 일본의 젊은 회사원들은 다른 회사로 전직하거나, 적성에 맞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거나 새로운 일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하지만, 고도 경제 성장기에 입사한 단카이 세대는 자기 회사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안정적인 종신고용제에 보호받으며 버블경제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일 이외의 일에는 관심을 쏟을 기회조차 없는 회사인간으로 ‘사육’되었다.

이들에게는 정년 퇴직이란 인생의 큰 위기다. 회사를 나서면 돈독한 친구나 지인도 없고, 회사일을 빼면 크게 관심을 갖는 주제도 없다. 회사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삶의 목표가 사라진 듯 허탈감과 고독감에 빠지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애로 사항도 있고 그럴 때마다 “은퇴 이후에는 즐기는 삶을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오로지 회사일에만 몰두한 사람에게는 삶을 즐기는 것만큼 난이도가 높은 일이 없다. 삶을 즐기는 것에도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직장에서 은퇴를 했거나 자녀의 양육이 끝난 장년 세대가 지역 활동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는 것을 ‘지역 데뷔(地域デビュ-)’라고 한다. 정년 퇴직 이후에 새로운 취미를 갖거나,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친목이나 봉사 활동에 참가하는 등 지역 커뮤니티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것을 뜻한다. 2010년을 전후로 생긴 말인데, 돌이켜 보면 그 때가 바로 단카이 세대가 고령층에 접어들기 시작한 시기다. 은퇴자의 지역 데뷔는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이다. 회사원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지역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방법인 것이다. 활발하게 지역 활동에 참여하는 은퇴자일수록 건강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정부나 시민 사회도 지역 데뷔를 은퇴자의 심리적 어려움을 돕는 중요한 해법으로 보고 적극 권장하고 있다.

◇ ‘지역데뷔’에 어려움을 겪는 회사인간

그런데 문제가 있다. 회사인간에게 지역 데뷔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회 경험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직장일과 무관한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경험은 매우 적다. 회사라는 껍데기를 벗어 던진 상태에서는 타인과 인간 관계를 쌓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입사한 시기나 직위에 따라 인간 관계의 상하가 규정되고, 거래처에서는 비즈니스 성격에 따라 정해진 갑을 관계가 존재한다.

반면, 지역 커뮤니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대등하다. 그들과 친해지려면 상대와 동일한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스킬이 필요하다. 이런 스킬은 회사에서 익힌 비즈니스 매너와는 전혀 다르다. 과거 회사에서 하듯이 행동하거나 높은 지위나 전문적인 경험을 뻐기듯이 드러내면, 오히려 미움을 받기도 쉽다. 본인은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말을 걸지만, 주위에서는 잘난 척하는 ‘꼰대’인 양 껄끄럽게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지역 커뮤니티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동등하고 일상적인 인간 관계에 좀처럼 끼어들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직장에서의 성취감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서글픈 것은 회사일에 ‘영혼을 갈아넣은’ 그들의 노력이 은퇴 이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오랜 회사생활에서 은퇴한 고학력 남성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지 못해 곤란함을 겪는다는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직장과 일을 위해 사적인 삶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가뜩이나 고달픈 은퇴 이후의 삶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나마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젊은 세대는 ‘은퇴 이후에 삶의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구시대적 발상에는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내게는 젊은이들의 그런 태도가 현명해 보인다. 회사에 헌신하고 일에 몸바치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일상적인 인간 관계도 충실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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