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상원은 국민의 약 30.2%가 의료 사막화 문제를 겪고 있다고 발표했다. 의대 정원을 1만300명까지 늘리겠다는 방침을 추진 중이지만 의료 인력 부족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고 있다.
2020년 6월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임금인상과 공공의료 투자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한 의료인들. ©EPA
프랑스 내 의료 인력 확충 요구가 지속해서 나오고 있다. 2011년 OECD 평균(인구 1000명당 3.1명)보다 높은 3.3명 수준이던 프랑스 의료 인력 수는 2021년 인구 증가로 OECD 평균(3.7명)보다 낮은 3.2명으로 줄어들었다. 2021년 10월27일 일간지 〈리베라시옹〉과 인터뷰한 올리비에 베랑 전 보건장관은 “의료 인력이 부족해서 국립병원 일부의 규모를 줄이거나 닫아야만 하는 일이 발생했다”라고 인정했다. 코로나19로 환경이 열악해졌다는 점도 의료 인력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연구자문위원 장프랑수아 델프레시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20%의 공공의료병원 병상이 인력 부족으로 폐쇄됐다.
프랑스 의료서비스는 여러 측면에서 한국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04년부터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고, 주치의를 선정한 환자는 진료비 환불 비율(최대 70%)을 높여 개원의나 병원 및 보건소 의사에게 장기간 외래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왔다. 또한 일반의와 전문의를 구분해, 일반 주치의를 거친 후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개업의의 경우 보험공단과의 협약으로 정해진 진료비(현 26.5유로, 약 3만9000원)를 준수하는 ‘섹터1 개업의’와 보험공단의 환불정산 기본 금액은 같으나 진료비를 의사가 자유롭게 책정하고 세금을 더 내는 ‘섹터2 개업의’로 나뉜다. 또 진료를 받으려면 미리 인터넷 사이트나 독톨리브(Doctolib)라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예약한 뒤 방문해야 한다.
프랑스의 의료 공급은 국립병원과 민간병원의 협력을 통해 이뤄져왔다. 2010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국립병원 비율은 66%, 민간병원은 34%를 차지한다. 국립병원에서부터 불거진 의료 인력 부족은 비단 코로나19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2021년 10월27일 라디오 프랑스앵포와 인터뷰한 프랑스 간호사조합(SNPI) 관계자는 “마크롱 대통령 정부는 첫 임기 시작 후 2년간(2017~2018년) 병상 7000개를 폐쇄했다”라고 지적했다.
보건부 공식 집계에 따르면 2020년에 병상 5700개, 2021년에 4300개가 폐쇄됐다. 2022년 6월7일 의료계는 정부에 국립병원 인력 부족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 참여한 병원 임원 나탈리 마르샹은 “오늘날 의료인은 밥 먹을 틈도, 쉴 틈도 없이 하루 12시간에서 14시간 일하는데 병상과 의료 서비스는 계속해서 폐쇄되고 있다. 의료인은 국민이 위험에 처한 상태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호소했다. 같은 해 9월16일 파리 주요 병원인 파리 공립의료원(AP-HP)도 간호사 1000여 명과 의사가 부족해 병상 18%를 폐쇄했다고 발표했다.
지역 불균형 문제도 심각하다. 2015년 국립의료프랑스위원회(CNOM) 조사에 따르면 도시 의료 인력은 인구 1000명당 약 4.5명인 데 비해 지방은 1.4명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2022년 3월29일 프랑스 상원은 국민의 약 30.2%가 의료 사막화(Déserts médicaux) 문제를 겪고 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남동부 비엔의 유일한 의사 세실 리샤르는 하루에 30명을 진료하며 환자 총 2000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부 지역 샤토루에서 일하고 있는 일반의 티에리 켈레르 역시 하루에 환자 30~35명을 진료한다. 서부 방데 지역의 라로슈쉬르용의 경우 시민 7300명이 주치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의사 되고 싶다’ 14%에 그쳐
전문의 접근성은 더 어렵다. 2023년 10월12일 개업의 파업을 앞두고 남부 포(Pau) 지역 일반의 보니크 코르베스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전에는 심장 전문의 진료 예약을 3주간 기다려야 했지만, 현재는 4~5개월이 걸린다. 프랑스의 평균 진료 시간은 23분에 달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진료에 할애하기 때문에 주마다 3~4시간씩 걸리는 행정 업무를 줄일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심각한 지역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7월 의료체계현대화법에 따라 고급실무간호사(IPA)는 ‘의료 사막’ 지역에 있는 환자를 방문해 채혈, 청진과 같은 진료를 실시한 뒤 만성질환 환자에 대한 처방전을 공급하고 보고서를 의사에게 제출할 수 있게 됐다. 남서부 샤랑트마리팀 지역의 정형외과 의사 아가트 타퐁은 의료 사막 지역에 있는 환자를 직접 방문하기 위해 자신의 트럭으로 ‘이동병원’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샤랑트마리팀의 작은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접근성 있는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2023년 11월17일 프랑스철도청(SNCF) 영업 대표 라파엘 폴리는 2028년까지 프랑스 전 지역 300개 역에 의료 공간을 설치하고 간호사와 함께 원격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편 효율적인 병원 운영을 위한 고육지책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토끼세(taxe lapin)’ 도입이다. 2023년 11월22일 프랑스 상원은 매년 약 27만 건에 달하는 진료 예약 취소를 막기 위해 노쇼(no-show) 환자에게 ‘토끼세’라는 벌금을 매기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4월7일 일간지 〈르몽드〉 보도에 따르면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2025년 1월까지 5유로(약 7300원)에 해당하는 토끼세 도입 목표를 공식화했다.
프랑스 정부는 의료 인력 확대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지만, 의사 부족 문제는 쉽사리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1971년에 만들어진 의대 정원 제한(Numerus clausus, 라틴어로 ‘닫힌 숫자’라는 의미) 제도를 2019년 폐지하고, 의대 정원을 매년 약 8500명에서 1만300명까지 늘리겠다는 방침을 추진 중이지만, 이것만으로 의료 인력 불균형을 해소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2022년 9월 일반의 의대생들의 인턴 기간을 1년 늘려 의료 사막 지역에서 학업을 마치게 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당사자인 의대생들은 반발했다. 정부 발표 직후 국가인턴연합(ISNI)의 올리비아 프레노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인턴들에게 강제적으로 (의료 사막 지역에서) 일을 시킨다면 파업하겠다. 인턴 과정의 중심인 교육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인턴 조합과 협상이 필요하다. 의료 사막 지역에서 일하면 충분한 교육을 해줄 교육자가 없다는 현실이 따른다”라며 반대 이유를 밝혔다.
프랑수아 브론 전 보건장관은 지난해 5월3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10년 후에나 더 많은 의사를 얻을 수 있는 게 현실이고, 그 역시 부족하다”라면서 현역 의사들이 업무 과중의 원인으로 꼽던 행정 업무를 간소화하겠다고 밝혔다. 의료 인력의 노령화로 60세 이상 일반의가 34.2%에 달하는 현실을 고려해 의사들이 환자 진료에 집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프랑스 상원의 2022년 3월29일 보고서에 따르면, ‘섹터2 개업의’를 제외할 경우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진료비를 받고 있다. 같은 해 6월7일 한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레미 구아댕은 언론 인터뷰에서 “1주일에 65시간 일하고 1611유로(약 236만원)를 급여로 받는다”라고 말했다.
2008년 국립의료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성인 1000명, 일반의 503명 대상)에 따르면 국민 58%는 ‘의사가 가장 명예로운 직업’이라고 답했다. 〈르피가로〉는 “이 조사는 한 가지 큰 역설을 보여준다. 응답자의 14%만이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명예로운 직업이지만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의미다”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6월15일 여론조사기관 Ifop의 조사(1003명 대상)에 따르면 응답자의 74%가 의료 사막화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가 원하는 곳에 개업하는 것을 제한하는 정책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