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통령' 등극한 해리스, 전당대회까지 파죽지세
'흑인이 맞느냐' 며 막말로 인종 가르는 트럼프
전략가들 "쫓기는 트럼프의 필사적 생존 본능"
양극화 된 美 정치, 트럼프즘은 여전히 유효
8년 전 '갈라치기' 통할지, 美의 선택 남아
총기 피격 사건 이후 귀에 거즈를 덮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15일(현지 시간) 밀워키 공화당 전당대회장에 입장할 때만 해도 “대선은 이미 기운 게 아니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미국 주류 언론들은 최근 보름 동안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관련 기사로 홈페이지를 도배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해리스의 인기는 더욱 뜨겁다. 해리스는 수많은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을 양산하며 ‘밈통령’으로 등극했다. 춤추는 해리스의 동영상이 틱톡을 지배한 가운데 대선 경합주에서 순위가 바뀌고 있다는 여론조사도 잇따른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된 해리스의 상승세는 적어도 이달 19~22일 시카고 전당대회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해리스 허니문’으로 미국 전역이 들썩이는 사이 트럼프는 지난달 31일 전미흑인언론인협회(NABJ) 행사에 참석해 잠잠했던 말 폭탄을 다시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는 해리스를 향해 “흑인이 맞느냐”고 저격했다. 인도계와 아프리카계가 섞인 해리스가 평생 인도계로 살아오다가 흑인 표심을 얻기 위해 흑인으로 ‘전향’했다는 식의 억지 논리다. 사실과 다른 얘기에 청중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막말 세례는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에서도 충격을 가져왔다. ‘해리스를 성별·인종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그의 급진적인 진보 정책을 문제 삼자’는 것이 공화당의 대선 전략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트럼프는 다시 뉴스의 중심부로 들어왔다. 트럼프의 막말은 실수가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보라는 분석이 따른다.
공화당 전략가 척 코플린은 “트럼프는 공화당이 해리스의 급부상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필사적으로 정치적 본능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고 짚었다. 또 다른 전략가는 “트럼프의 정치관은 문화적인 관심을 지배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상관없다. 다만 그에게 집착하길 원한다”고 했다. 해리스 부통령에게 빼앗긴 대중의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트럼프가 동물적인 본능을 깨우고 있다는 것이다.
미 정치권은 다시 시작된 트럼프의 갈라치기와 인신공격이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본다. 뉴욕타임스(NYT)는 상대방을 ‘우리 중 하나가 아닌 외부인’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오래된 선거 전략이며 트럼프가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분석했다. ‘해리스는 흑인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는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등이 해당한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상대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향해 “불쾌한 여자”라고 모욕했는데 이 같은 막말이 보수 백인 남성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쾌감을 줬다는 분석까지 있다. 최근 해리스를 향해 ‘멍청이’ ‘미친 해리스’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총기 피격 이후 승기를 잡았다가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된 트럼프가 2016년의 플레이북을 재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8년 전 상대방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적이 있고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철저히 양극화된 미국의 정치 구도와 주별로 선거인단을 승자독식하는 시스템은 ‘트럼프식 정치’가 통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해리스의 상승세가 만만치 않지만 선거인단 ‘매직넘버’ 270명을 확보하는 경로는 여전히 트럼프에게 유리하다는 것이 현시점 미 선거 분석기관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하지만 트럼프의 상대는 더 이상 인기 없는 노인이 아니다. 훨씬 젊고 에너지가 넘치며 젊은이들 사이에 팬덤을 만들어 낼 정도로 강력하다. 미국의 유권자들이 ‘흑인 여성’이라는 심리적 장벽을 넘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아니면 ‘백 투 더 트럼프’를 택할지 올해 미국 대선은 말 그대로 ‘세기의 대결’이다.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