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0일 미 라스베이거스 유세 현장에서 특유의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카멀라 해리스. photo 뉴시스
최근 실시된 각종 미국 대선 관련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가 전국 평균 지지율뿐 아니라 주요 경합주에서도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를 앞서고 있다는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와 ABC방송이 여론조사업체 입소스와 함께 지난 8월 9일부터 13일까지 미국 성인 2336명 중 등록 유권자 19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상대결에서도 해리스는 49%, 트럼프는 45%를 얻었다. 해리스 지지세는 민주당이 8월 19일 시카고 전당대회를 치르면서 더 단단해지는 양상이다.
지난 7월 21일 바이든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직에서 전격적으로 사퇴할 때만 해도 민주당에 불리했던 구도를 해리스가 단기간에 역전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이들 요인이 승리를 결정짓는 최종 변수는 아닐지라도 불과 90일도 남지 않은 대선 레이스의 향배를 점쳐볼 수 있는 유익한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선거는 일정한 리듬을 따른다. 매년 상반기 민주·공화당의 예비선거인 프라이머리와 코커스가 진행되고, 대개 여름에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각 당의 후보자가 결정된다. 대선 주자로 확정된 후보들의 본격적인 선거 유세는 노동절(9월 첫째 월요일, 올해는 9월 2일)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로 해리스 부통령이 대타로 지명됨에 따라 1년 이상 계속되던 바이든-트럼프 간의 장거리 마라톤이 100일도 안 되는 해리스-트럼프 간의 단거리 달리기로 바뀌었다.
마라톤에서 단거리 경주로 바뀐 미 대선
9월 중순부터 주요 격전지 중 하나인 펜실베이니아주부터 사전투표가 시작될 예정인데 양당 분석가들은 이러한 일정이 후보지명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겪는 먼지털이식 조사, 인신공격성 비난, 시시콜콜한 정책 논쟁 등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해리스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4년 대선 당시 부시 대통령의 수석 선거전략가를 맡았던 매튜 다우드는 "짧은 선거운동은 해리스에게 상당한 이점을 준다"며 "공화당은 바이든과 그전의 힐러리 클린턴을 수년간 끊임없이 공격해왔지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59세의 활기찬 여성 후보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진영이 이미 수개월 동안 공들여 준비했던 캠페인 플랜을 포기하고 짧은 시간 내에 '해리스 맞춤형'의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를 "흘러간 과거 미국의 어색한 잔재(the awkward remnant of yesterday's America)"로 몰아붙이며 자신을 미래의 희망을 주는 새로운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해리스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다시 전략을 짜야 한다는 의미다.
민주당 뜨겁게 달군 '브랫' 소동
해리스 등판으로 민주당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브랫(brat)' 소동이다. 해리스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다음 날 Z세대에게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영국의 유명가수 '찰리(Charli) XCX'가 소셜미디어(SNS)에 "카멀라는 브랫(kamala IS brat)"이라는 짧은 멘트를 올려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자 해리스 캠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거캠프의 트위터 배경을 'Brat' 앨범과 똑같은 글꼴과 색조로 바꿨다.
'브랫'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찰리의 틱톡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약간 지저분하고, 파티 좋아하고, 가끔은 멍청한 말을 하고, 자신감을 느끼다가도 무너질 수 있지만, 그 와중에도 파티를 즐기고, 매우 솔직하고, 매우 무뚝뚝하고, 약간 변덕스럽고… 그래요, 브랫처럼 멍청한 짓을 좋아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게 브랫이고, 당신도 브랫이고, 그런 것이 브랫이지요."
'브랫' 앨범을 편집하여 만든 해리스 부통령의 동영상은 조회수 수백만 회를 돌파하며 화제를 모았다. 소셜미디어에 '해리스는 브랫'을 화두로 삼은 밈(meme)도 넘쳐난다. 이런 밈과 동영상으로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울한 패배의식에 쩔어있던 민주당 진영에 갑자기 활기가 도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8월 5일 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카멀라 해리스의 재창조'라는 이례적인 제목의 기사에서 해리스의 '대변형 작전(Operation Transfiguration)'이 성공할 것인지를 분석했다. '재창조' '대변형' 등은 누가 보더라도 과장된 표현이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미국의 대선 레이스에서 특정인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전'과 '후'의 모습이 판이하게 달라진 점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신선해 보인다. WSJ에 의하면 해리스는 더 이상 입만 열면 구설수에 오르고,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제 발등 찍는 자멸적 정책을 반복하던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잔 다르크나 마거릿 대처 같은 반열에 올라서기 직전의 인물로 비친다.
실제 해리스는 지난 6월 말까지만 해도 정치적 패자(loser)였다. 지난 3년간 지지율은 대통령보다 낮았고, 역대 그 어떤 부통령보다 평가가 나쁜 데다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런 같은 자칭 '사회주의자'들과 의기투합했다. 5년 전 대선 캠페인에서는 가스 채굴(fracking) 금지, 불법 이민자들에게 각종 혜택 부여(운전면허증 허가 등), 총기 소유자가 특정 종류의 총기를 정부에 '판매(buyback)'하도록 의무화,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을 계기로 벌어진 시위에서 약탈·폭력 등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 등으로 구설수를 자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민주당의 전략가와 보좌진, 거액 기부자와 인플루언서, 친민주당 성향의 언론 등이 원팀이 되어 '해리스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하고 있다. WSJ는 이를 가리켜 지금까지 어떤 정당도 시도한 적이 없는 놀라운 '대변형 작전'이라고 불렀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수석 스피치라이터를 지낸 까칠한 보수 논객 페기 누난도 지난 7월 25일 WSJ에 '카멀라 해리스의 서프라이즈'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누난은 이 칼럼에서 지금까지 오랫동안 해리스가 도저히 트럼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해리스가 이길 수 있다"고 밝혔다. 이미 미국은 50 대 50의 형국이다. 양쪽(민주·공화)이 각자 40을 나눠 갖고, 남은 20을 놓고 다툰다. 그런데 전문용어로 트럼프의 경우는 '바닥은 높고, 천장이 낮은(a high floor but a low ceiling)' 케이스다. 콘크리트 지지층은 두껍지만 확장성이 약하단 의미다.
누난은 최근 밀워키와 휴스턴 유세에서 해리스가 "인상적이고 강렬한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밀워키 연설의 주제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였다. 해리스는 2021년 1월 6일 의사당 폭동이 벌어진 그날로, 인종차별·성차별이 난무하던 '트럼프의 미국'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새롭고 흥미로운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에는 영국 유명가수 찰리 XCX의 신작 앨범 ‘브랫’과 해리스의 우스갯소리 소재인 ‘코코넛 나무’를 믹스한 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찰리는 자신의 새 앨범을 소개하면서 ‘카멀라는 브랫이다’는 발언을 했다. photo 유튜브
"트럼프의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해리스에 대한 인식이 오래전부터 굳어져 있던 사람들은 먼발치에서만 지켜보다가 지금은 새로운 인물로 보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해리스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트럼프 대선 캠프가 가장 두려워하던 시나리오다. 사실 트럼프 대선 캠프는 노쇠하고 활기 없는 조 바이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들이 정작 두렵게 본 것은 노련한 전략가, 유능한 정치인, 잘 구축된 당내 인프라가 유권자들과 긴밀하게 얽혀 기계처럼 움직이는 '제도적 민주당(institutional Democrats)'이었는데 이것이 해리스 등판으로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리스가 대변신에 성공하기 위한 최대 과제는 '열성적 좌파들과의 거리두기'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번 대선 도전 초반에 참패한 결정적 이유는 샌더스·워런 등의 극좌파들이 선호하는 어젠다들을 섣불리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민주당 내부에서는 2020년 대선 당시와 비교해 해리스에 대한 호감도가 급등하고 있다. 여기다가 트럼프가 점찍은 부통령 후보 J D 밴스의 설화까지 해리스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밴스의 '무자녀 고양이 여성(childless cat ladies)' 발언은 "단지 비꼬는 말(sarcastic comments)에 불과하다"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쓸데없이 '무자녀 캣맘'들을 도발하여 우환을 자초한 밴스의 무개념 발언에 대해 이런 식의 비판을 가했다. "밴스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자칭 보수주의자라는 많은 사람들, 특히 도널드 트럼프처럼 해리스 같은 온건한 중도좌파 민주당원들을 '급진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진짜 '급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미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국을 여러 세대 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과거로 되돌리려 한다. 무엇보다 여성의 역할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2023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클라우디아 골딘이 말한 것처럼, 1970년경부터 미국 여성의 역할에는 '조용한 혁명'이 일어났다. 삶의 선택권이 크게 확대된 많은 여성들이 '전통적 경로' 대신 이제 직업을 가진다. 실제로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말기에 벌써 25~54세 여성의 약 4분의3이 유급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다.
자신감과 인간적 면모… '깔깔웃음의 괴력'
그리고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레이건 시절로부터 거의 40년이 흐른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인은 여성의 역할을 가사와 육아로 좁게 정의하고 무자녀 여성은 '이상하고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사회를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크루그먼은 "여성의 낙태권 반대에 정치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 밴스의 발언은 시계를 반세기 이상 거꾸로 돌리려 한다"고 비판한다.
해리스 부통령의 특이한 캐릭터도 유권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해리스는 온몸을 뒤흔들며 잇몸을 다 드러내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이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요란스럽고, 조금은 어색하고, 때로는 약간 모자란 '팔푼이' 같은 인상마저 준다. 하지만 특유의 웃음은 중독성과 전염성이 강하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로빈 기브한은 지난 7월 30일 자 워싱턴포스트 기사 주제를 '카멀라 해리스 깔깔웃음의 괴력'으로 잡았는데 이 칼럼에서 기브한은 해리스의 웃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개 그의 웃음은 시끄럽고 시끌벅적하고 방정맞다. 때로는 어깨를 들썩이며 힘겹게 웃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웃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스릴·재미·카타르시스,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벽에 주먹을 날려야 할지도 모르는 그 순간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의 깔깔웃음에는 자신감과 카리스마와 인간적 면모가 담겨 있다는 평가다. 혹자는 그런 웃음을 여성혐오·인종차별·경멸·조소에 당당히 맞서는 파워의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현재 트럼프가 묘사하는 미국의 모습은 "성문 앞에 야만인들이, 성전 안에 이교도들이, 모든 유치원 교실에 포식자들이 어슬렁거리는" 끔찍한 나라다. 이처럼 위험천만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국가적 망신일 수 있다. 그래서 트럼프 후보는 잘 웃지 않으며, '터프가이'로서의 초인적 페르소나를 고수하려 애쓴다. 그런데도 해리스는 "시끄럽고 지저분하게(raucously and messily)" 웃는다. 한때 여성들의 시끄러운 웃음은 매너 없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지만 해리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 대담함을 보인다. 오히려 유세 현장에서도 웃을 줄 아는 배짱이 있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애틀랜틱(Atlantic)은 지난 7월 25일 칼럼에서 해리스 부통령을 가리켜 "모든 인종의 여성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2016년 대선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여성에게 투표하는 것이 유리천장을 깨고 '걸 파워(Girl Power)'를 기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더 이상 기념비적 이정표가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신체적 자율성,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것이라는 인식이 더 앞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가장 보수적인 주에서도 여성들이 자신의 생식권(reproductive rights)을 제한하는 법안에 반대해 왔다.
"해리스가 새로운 F 단어를 도입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여성만큼 열정적으로 캠페인을 벌일 수 있는 남성은 없다. 일례로 해리스는 브렛 캐버노 대법관 후보 인준 청문회에서 많은 상원의원들과 마찬가지로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이렇게 다시 물었다. "정부에 남성의 신체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생각할 수 있는가?" 여성의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처럼 남성의 신체에 대한 결정을 제한하는 법률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캐비노가 "그런 법은 생각할 수 없다"고 답하는 순간 해리스는 캐버노를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해리스의 괴짜 같은 '팔불출' 매력이 최근 몇 년 동안 변화한 온라인 미디어 환경에 힘입어 대중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청량제가 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LA타임스는 "해리스가 민주당에 새로운 F라는 단어를 도입했다"는 코믹한 제목으로 그의 깔깔웃음이 어떻게 민주당에 '재미'를 가져다 주었는지를 전했다. 원래 'F'는 4글자의 비속인데, 이걸 3글자인 'fun(재미)'으로 재치 있게 바꿔놓은 것이다. 대통령 후보가 소셜미디어 동영상에 등장하여 코코넛 나무에 올라가 댄스하고, 배꼽 잡는 웃음을 터뜨리고, 수다 떠는 모습은 미국 민주당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초유의 대사건이다. '폭발물 처리반이 폭탄을 해체하듯' 신중하고 진지하게 선거에 임하던 종전과 비교해서는 경이적인 변화가 벌어진 것이다.
민주당에 재미를 가져다준 해리스의 팔불출 웃음은 언론의 주목을 끌기 위해 습관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트럼프의 우거지상과 대조적이다. 물론 선거가 늘 그렇듯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다. 깔깔웃음이 언제 슬픈 눈물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도저히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침울함이 깔깔웃음과 'F' 워드가 넘치는 낙관주의로 바뀐 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민주당원들은 전당대회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공화당원들을 부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딩 수준의 쉬운 화법을 앞세운 트럼프는 거의 모든 이벤트·집회·행사를 일종의 리얼리티 쇼 무대로 뒤바꿔 놓는 재주가 탁월했다. 그것이 '트럼피즘(Trumpism)'에 명성을 가져다준 비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트럼프 추종자들은 쇼맨을 보는 것과 쇼의 일부가 되는 두 가지의 즐거움 때문에 그를 더욱 따른다. 트럼프의 집회에서는 활기와 에너지가 넘친다. '타락한 힐러리(Crooked Hillary)' '졸린 조(Sleepy Joe)' '로켓맨(Rocket Man·김정은)' 등등 트럼프가 붙인 별명들은 관중들의 박장대소와 탄성을 자아낸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쏟아지지만 '대단해(incredible)' '훌륭해(great)' '엄청나(huge)' '멋지네(terrific)' 같은 초딩 단어들은 관중들을 흥분시키는 마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민주당원들도 해리스 덕분에 이제 이런 즐거움을 누리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소셜미디어를 한창 달구고 있는 카멀라 해리스의 '코코넛 나무' 동영상에서 이것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코코넛 나무'의 출처는 다음과 같은 해리스 부통령의 발언이다. "우리 엄마는 종종 저희를 힘들게 하시면서 '대체 너희 젊은이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어요. '너희는 방금 코코넛 나무에서 떨어진 줄 아니?'라고요.(웃음)"
'코코넛 나무에서 떨어진 아이'란 짓궂은 표현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우리말과 비슷하다. '코코넛 나무'는 가족·유산·성장배경의 중요성을 깨우치려는 은유적 표현이다. 온라인에는 '막춤을 추고, 깔깔거리고, (일부러) 하이힐 신고 우스꽝스럽게 걷는' 해리스 동영상이 코코넛 나무 동영상과 함께 확산 중이다.
여성 후보 대놓고 지지하는 초유의 현상
지난 8월 2일 자 뉴욕타임스(NYT)가 게재한 '카멀라 현상(Kamala nomenon)' 분석 기사에는 트레이시 네일러(56)란 이름의 소아과 의사가 등장한다. 그는 해리스가 처음 대선에 출마하였을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해리스의 깜짝 등장으로 마치 '구원'을 받은 듯한 감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네일러 같은 카멀라의 지지자들에 의하면 이번 대선은 단순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영적 운동이자, 역사적 변곡점을 뜻한다. 이들은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열기와 흥분을 느낀다고 말한다.
'카멀라 현상'의 두드러진 특징은 여성 후보에 대한 여성 지지자들의 열성적 응원이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 캠페인의 여러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많은 여성들이 여성 후보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표명을 부끄러워하거나, 지레 겁을 먹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영향력 있는 여성들로 이뤄진 친힐러리 성향의 페이스북 커뮤니티인 '팬츠수트 네이션(Pantsuit Nation)'이라는 폐쇄적 비밀 그룹이 존재했었지만 이들은 소극적 행보로 일관했다. 공화당 진영의 트롤링과 악플을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스 캠페인에서는 그런 일을 찾아볼 수 없다.
여성 대통령 후보가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는 현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해리스의 연설을 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혼혈 여성인 해리스가 도널드 트럼프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믿음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머릿속에서 과거 해리스의 실패와 정치인으로서 일관성 없는 기록들은 모두 순식간에 지워져 버렸다.
민주당 여론조사업체 책임자인 코넬 벡처에 따르면 젊은 흑인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해리스의 매력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버락 오바마를 보았던 방식으로 해리스를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This too can happen, there too can I be).'"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정체성이다. 조 바이든이 사퇴한 다음날 4만명의 흑인 여성들이 선거운동 조직에 합류하고, 그다음 날 2만명의 흑인 남성들이 동참하고, 그 후 6만명 이상의 백인 남성들이 해리스 지지를 선언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연대와 분노의 발작(a paroxysm of solidarity and angst)"이라고 표현했다.
해리스 진영의 캠페인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발빠른 전략적 궤도 수정인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사례가 그동안 역대 민주당이 애지중지하던 '민주주의'란 단어 대신 '자유(freedom)'로 방향을 바꾼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동층은 민주주의 보호에서 트럼프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그러니 민주주의를 강조할수록 민주당에 손해인 셈이다. 해리스 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자유, 미래, 낙태, 국경 순이다. 요컨대 해리스 대선캠프의 핵심 키워드는 '2F(freedom·future)'이다. 해리스가 2F를 사용하는 빈도가 바이든의 4배에 이른다. 그러면서 선거 유세에서 바이든보다 웃는 빈도도 4배 이상이다.
트럼프가 별명 짓기에 실패한 까닭
결론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를 거두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경쟁 상대가 노쇠한 81세의 바이든보다 20세나 젊고 패기만만한 해리스로 바뀌었는데, 트럼프의 전략·전술은 바이든 당시와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2016년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낡은 기득권의 상징으로 몰아붙여 승리를 거두었다. 바이든은 사퇴 전까지 트럼프가 재선에 부적합한 인물로 묘사할 수 있는 비교적 손쉬운 상대였다.
반면 해리스는 트럼프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상대다. 훨씬 젊고 훨씬 활기차고 훨씬 자유분방하다. 아마도 해리스는 트럼프가 '타락한 힐러리' 또는 '슬리피 조'처럼 별명을 붙이지 못한 유일한 상대일 것이다. 한때 트럼프는 해리스를 '깔깔거리는 카멀라(laffin' Kamala)'로 불러보려고 했다. 하지만 '브랫' 밈이 선풍을 일으킨 이후 깔깔거림이 오히려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정치적 무기'라는 점을 간파했는지 그런 별명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해리스가 대선 주자로 결정된 지 불과 3주도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덧 추세가 트럼프에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오는 9월 10일 해리스-트럼프 TV 토론은 과연 트럼프가 불리한 추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
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