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성착취 등 불법 행위를 방조했다는 혐의를 받는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CEO)가 범죄에 악용되던 일부 기능을 삭제하고 검열 기능을 개선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한국에서 텔레그램을 통해 딥페이크(인공지능 기반 이미지 합성) 성착취물이 무분별하게 유포되는 가운데 나온 조치여서 실효성이 주목되고 있다.
두로프는 지난 6일(현지시간) X(옛 트위터)를 통해 "(텔레그램의) '근처 사람들(People Nearby)' 기능을 없앨 것"이라고 밝혔다. 주변에 다른 텔레그램 이용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기능으로 그간 "범죄 악용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 기능을 통해 해커들이 사용자의 연락처, 민감정보 등을 훔쳐 사기를 치는 등의 위험이 높기 때문이었다.
두로프는 "텔레그램 이용자 99.999%는 범죄와 무관하지만, 0.001%가 전체 이미지를 나쁘게 해 해당 기능을 없앤다"고 말했다.
두로프는 또 익명 블로그 서비스인 '미디어 업로드' 기능도 비활성화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 그는 "미디어 업로드 기능이 일부 사람에 의해 잘못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4일 프랑스에서 체포된 텔레그램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파벨 두로프가 일단 석방됐지만, 출국금지 상태에서 계속 수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AP=연합뉴스
두로프가 직접 밝히지 않은 조치도 있다. 일례로 텔레그램의 '자주 묻는 질문(FAQ)'에서 "개인 채팅 내용은 보호되며 이를 대상으로 한 조정 요청은 처리되지 않는다"는 답변 내용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가디언은 "앞으로 텔레그램 이용자들이 관리자에게 채팅 내용과 관련한 신고가 가능해져 검열 기능이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간 두로프는 "텔레그램이 '무법천국'이라는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처벌 위기에 놓이자 태세 전환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와 프랑스, 아랍에미리트(UAE), 카리브해 섬나라인 세인트키츠 네비스 등 다중국적자인 두로프는 지난달 24일 미성년자 성착취물 소지 및 배포, 마약 밀매, 조직범죄 등을 방치했거나 공모한 혐의 등으로 프랑스 경찰에 체포됐다가 500만 유로(약 74억원)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현지에 머물면서 매주 두 차례 경찰에 출석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는 실제 재판 여부를 결정하는 예비기소 단계에 있다.
"320만개 메시지 보니…범죄자 창궐"
텔레그램을 범죄에 악용하는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만6000개 텔레그램 계정의 메시지 320만개를 분석한 결과 "텔레그램은 범죄자와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의 놀이터가 됐다"고 짚었다.
NYT에 따르면 백인 우월주의자가 운영하는 1500개 계정은 100만 명에게 인종차별 콘텐트를 노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소 20개 계정에서 무기를 팔았고, 최소 22개 계정에서 코카인 등 마약이 판매됐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는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기습하면서 텔레그램에서 실시간으로 영상을 중계했다. 지난해 10월에만 하마스 관련 계정 40개에 올라온 전쟁 영상물 조회 수가 4억회 이상이었다.
NYT는 "범죄자·테러리스트·사기꾼이 당국의 감시를 피할 수 있게 한 텔레그램은 불법적·극단주의적 활동이 번창하는 것을 외면했다"고 꼬집었다. 레베카 와이너 뉴욕 경찰청 테러방지 부국장은 "텔레그램은 악의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자들이 모이는 인기 장소"라면서 "당신이 악한 사람이라면 텔레그램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고 신문에 말했다.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일대에서 열린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대응 긴급 집회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일상을 쟁취하자!'에서 참석자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인원수에 제한을 거의 두지 않은 채팅방도 도마에 올랐다. NYT는 "왓츠앱의 경우, 채팅 인원수와 링크 공유를 제한해 허위 정보 확산을 늦췄지만, 텔레그램 채팅방 관리자는 최대 20만명 방을 운영할 수 있었다"며 "이런 비판에도 텔레그램은 오랫동안 법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왔다"고 전했다.
사용자가 크게 늘면서 영향력이 커졌는데도, 텔레그램이 콘텐트를 관리·감시할 인력은 충분히 두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NYT는 "10억 사용자를 둔 텔레그램의 정규직 직원은 60명에 불과하다"며 "텔레그램은 각국 법 집행 기관들의 지원 요청도 꾸준히 무시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CEO가 처벌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회사도 달라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NYT는 "많은 국가에서 텔레그램에 대한 인내심이 적어지고 있다"며 "유럽연합(EU) 등은 디지털 서비스법에 따라 텔레그램에 대한 새로운 감독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