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공예품, 철강까지...중국산 제품의 역습
지난 18일 베트남 하노이 외곽 밧짱 도자기마을에 위치한 한 상점에서 직원이 제품을 정리하고 있다. 밧짱에서 장인이 생산한 제품이 주를 이루지만,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도 판매한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지난 18일 베트남 하노이 중심가에서 남동쪽으로 18㎞가량 떨어진 밧짱 도자기마을. 1,000년간 이어진 전통 방식으로 만든 도자기를 파는 가게가 마을 입구부터 길게 늘어섰다. 형형색색 화병과 단아한 색상의 접시, 주전자 등이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몇몇 가게에서는 한자 라벨 스티커가 붙은, 다소 저렴해 보이는 그릇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화려한 공예품 사이에서 다소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가게 한편에는 한자가 적힌 박스 무더기도 있었다. 주인은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라며 밧짱에서 생산된 도자기보다 30~40% 저렴하다고 귀띔했다.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한 지역에서 왜 굳이 중국산 저가 제품을 들여오는 것일까. 주인에게 묻자 그는 우선 “장인이 직접 만드는 밧짱 도자기는 고급스럽고 정교하며 높은 온도에서 굽기 때문에 품질이 우수하다”고 전제했다. 이어 “기계로 대량 생산하는 중국산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면서도 “다만 저렴한 제품을 찾는 관광객 수요를 고려해 중국 도자기도 일부 수입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18일 베트남 하노이 외곽 밧짱 도자기마을의 한 상점 입구에 한자가 적힌 박스가 놓여 있다. 안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도자기 그릇이 들어 있다(큰 사진). 왼쪽 하단 작은 사진은 한자 라벨 스티커가 붙은 중국 저가 수입 그릇.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옆에 있던 직원도 거들었다. “예술성이 아니라 가격만 따지면 원재룟값이나 인건비를 감안할 때 (밧짱 도자기가) 중국산과는 경쟁하기 어렵다. 그나마 이 지역은 도자기의 10% 정도만 중국 제품인데, 이미 다른 시장에는 중국산이 상당수 들어온 상태다.”
비단 베트남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남아시아가 중국산 저가 상품의 공습에 몸살을 앓고 있다. 동남아는 그간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제조 분야 등에서 비교 우위를 점해 왔다. 그러나 몇해 전부터 섬유, 화장품, 전자 제품, 공예, 철강 등 분야를 막론하고 재고 떨이 수준의 중국발 초저가 상품이 밀려오면서 관련 업계는 물론 경제마저 휘청거리는 분위기다.
각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중국산 제품 수입 문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의 대(對)중국 경제 의존도가 높은 탓에 규제 효과가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지난 18일 베트남 하노이 교외 밧짱 도자기마을의 한 상점에 베트남 장인들이 생산한 화병과 그릇이 전시돼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1년 사이 공장 2000곳 문 닫은 태국
‘메이드인 차이나’ 범람으로 골머리를 썩는 대표적 국가는 태국이다. 저가 중국산이 온·오프라인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예컨대 ‘태국 여행’을 상징하는 대표 기념품 ‘코끼리바지’의 경우, 현지에서 판매되는 제품 10개 중 7개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중국산 코끼리바지의 도매가는 개당 약 30밧(약 1,220원) 수준. 태국 상인들은 이 제품을 자국에 들여온 뒤 60~70밧(약 2,440~2,850원)에 판다. 태국 내에서 허가를 받고 정식 생산된 제품이 최저 100~200밧(약 4,000~8,000원)에 팔리는 점을 감안하면 두 배 이상 비싸다.
지난 7월 태국 방콕 왕궁에서 코끼리바지를 입은 관광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방콕=허경주 특파원
태국 정부가 저작권 보호를 이유로 복제품 수입을 금지했지만 관광객들이 저렴한 물건을 선호하는 까닭에 시장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코끼리바지는 하나의 사례일 뿐, 쇼피·라자다·틱톡샵 등 태국 전자상거래 플랫폼 곳곳에서도 중국 제품이 넘쳐난다.
현지 경제 싱크탱크 카시콘 리서치의 올해 2월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태국은 중국에서 4,695억2,000만 밧(약 19조1,300억 원) 상당의 소비재를 수입했다. 전체 소비재 수입의 41% 수준이다. 전자 제품(43.3%)이 가장 많았고, 신선·가공 과일(10%)과 의류·신발(9.3%), 가구 및 가정용 장식품(9.1%), 주방용품(9%) 등이 뒤를 이었다. 보고서는 “중국 수입품은 생산 비용이 낮아 저가 상품 분야에서 국내산(태국산) 제품과의 경쟁이 치열해졌다”며 “태국 제조 업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정도”라고 지적했다.
동남아시아 주요국의 대중국 수입액 규모 추이. 강준구 기자
가격 경쟁에서 밀린 태국 제조 기업들은 줄줄이 사업을 정리했다. 태국 산업부 집계에 따르면 작년 7월부터 올해 6월 말까지 1년간 태국 공장 1,975곳이 문을 닫았다. 전년 동기 대비 약 40% 늘어난 수치다. 태국산업연맹은 중국산 제품 수입으로 현지 제조 업체 생산량이 50%나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실업자가 된 사람도 5만1,541명에 달한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80% 급증했다.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 가까이 차지하는 제조업이 타격을 입자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태국 정부 국가경제사회발전위원회 수빠붓 사이체우아 위원장은 “값싼 (중국제) 수입품이 정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중국이 수출하지 않는 품목 생산으로 (산업) 초점을 옮겨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지난 7월 태국 방콕의 한 재래시장 매장에 코끼리바지 등 각종 의류와 기념품이 놓여 있다.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저가 제품이다. 방콕=허경주 특파원
실제 정부의 각종 대책도 쏟아지고 있다. 지난 7월부터는 그간 부가가치세(7%) 면제 대상이던 1,500밧(약 5만7,000원) 미만 수입품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온라인에서 부가가치세가 면제된 저렴한 중국 수입품이 범람한 탓에 태국 판매자가 경쟁에서 밀린다는 판단에서다. 올해 7월부터는 중국 전자상거래기업 테무까지 태국에 진출하자, 지난달 관계 당국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범정부 차원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테무 로고. 로이터 연합뉴스
산업 보호하려 세이프가드 발동
베트남의 경우, 올해 상반기 중국산 제품 수입액이 전년 동기 대비 34%나 급증했다. 중간재, 소비재 할 것 없이 고루 늘었다. 특히 직격탄을 맞은 분야는 철강 산업이다. 베트남의 중국산 철강 수입은 올해 상반기 571만 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2배 가까이 폭증했다.
올해 베트남 자체 철강 생산량이 작년보다 7% 늘어난 상황에서, 중국 경기 악화로 값싼 중국 철강까지 밀려들어오자 업계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철강은 건축 구조물과 선박, 차량 등의 제작에 쓰인다. 중국 부동산 시장 침체와 내수 부진 장기화로 현지 철강 소비가 급감한 탓에 잉여 물량을 이웃 국가에 ‘덤핑’(이해득실을 무시하고 헐값에 상품을 파는 일)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3일 베트남 하노이의 건물 공사 현장 앞을 오토바이들이 지나가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하노이 건축자재 상점 주인 득(40)은 “최근 호아팟 건설용 CB3-D18 철근 가격은 1㎏당 1만3,500~1만4,000동(약 730~758원), 같은 무게의 중국산은 1만3,000동(약 700원) 수준”이라며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것 같지만 철근 한 개만 해도 20㎏이 넘는다. 건설 현장에서 대량 사용할 경우엔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져 중국산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동남아 최대 철강 업체로 꼽히는 베트남 호아팟 그룹의 쩐딘롱 회장도 지난 4월 “국내 생산이 위험에 처해 있다”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업계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정부는 중국산 철강에 대한 반덤핑 과제 부과를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20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 현지 철강 업체의 제품들이 전시돼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인도네시아에서는 중국산 섬유 제품이 밀려들어 현지 공장 생산량이 70% 줄었다. 피해는 노동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올해 상반기 반텐, 서자바, 중부 자바 등에서 최소 12곳의 섬유 공장이 사업 재편에 나서거나 문을 닫았고, 1만4,000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대로 가다간 산업이 붕괴한다”는 업계 호소에 인도네시아 무역부는 지난 6월 수입 섬유제품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발동하겠다고 공언했다. 니트, 직물, 카펫 등 수입 제품에 관세를 100~200% 인상하는 게 핵심이다.
도자기 등 세라믹 제품과 전자 제품, 화장품 등의 수입 관세 인상 계획도 내놨다. 당시 줄키플리 하산 인도네시아 무역부 장관은 “국내 산업에 위협이 되는 수입품을 관리할 것”이라며 “추가 관세는 45~50% 수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말레이시아도 올해 1월 500링깃(약 14만 원) 미만 온라인 구매 수입품에 10% 판매세를 부과했다.
지난 7월 인도네시아 서자바주 반둥의 한 의류 공장에서 직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반둥=AP 연합뉴스
중국 ‘보복 조치’ 나설까 우려
그러나 각국의 규제가 지속될지에는 물음표가 붙고 있다. 동남아 각국의 대중 무역과 투자 의존도가 높은 탓에 중국을 과도하게 자극할 경우 ‘보복 조치’에 나설 게 뻔하고, 결국에는 자칫 자국 경제에 더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전체 교역 액수의 약 20%를 차지하는 역외 최대 교역국이다.
인도네시아는 세이프가드 발동 방침을 밝히면서도 대상을 ‘중국산’이라고 특정하지 않았다. 현지에서는 벌써 세율 인상 폭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도네시아는 중국에 에너지 자원과 전기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중국이 보복 관세나 금수 조치를 취하면 수출 산업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본 셈이다.
태국 상황도 다르지 않다. 태국 상공회의소 대학교 출신 국제무역학자 아트 피산와니치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태국 GDP의 15% 이상이 중국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중국 관광객이 필요하고, 수출을 위해 중국 시장에 의존하며, 중국의 외국인직접투자(FDI)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현실적인 제약이 많다는 뜻이다.
지난 20일 베트남 하노이의 한 전자기기 매장에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 오포(OPPO)의 신형 휴대폰이 전시돼 있다. 전자기기는 동남아시아 각국이 중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제품군 중 하나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