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부동산을 상징하는 빅토리아피크의 아파트들. 빅토리아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photo crowdsq.com
홍콩섬 서쪽에 있는 해발 552m의 빅토리아피크(중국명 太平山)는 홍콩 부동산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3.3㎡(평)당 주택 가격이 6억~7억원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비싼 집값을 자랑했다. 산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빅토리아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항구까지 이어지는 산사면에는 고급 아파트와 주택, 상업용 건물이 빼곡하다. 이곳을 반산(半山) 또는 미드레벨이라고 부르는데, 반산 지역 역시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하다.
빅토리아피크의 고급 주택은 우리 돈으로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고가이지만, 한때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귀했다. 중국 대륙의 부호들이 몰려와 앞다퉈 집을 샀다. 대륙 부자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해 사들인다고 해서 '트로피 주택'이라는 말이 붙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 "손 쓸 수 없는 상황"
그랬던 빅토리아피크 호화주택의 가격이 반 토막이 났다. 부동산 시장 거품 붕괴로 중국 경제가 장기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부호들이 줄줄이 홍콩 호화주택 처분에 나선 것이 주요인으로 꼽힌다. 2020년 보안법 도입으로 홍콩이 사실상 중국 대륙에 통합되면서 자유도시 홍콩의 매력이 사라진 것도 한 요인이다. 홍콩에 아시아 지역 본부를 뒀던 세계 주요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싱가포르 등지로 이전하면서 고급 주택 수요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1월28일 자에서 "홍콩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말기 암 환자 신세라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빚에 몰린 홍콩의 한 부동산 투자자 가문이 지난 7월부터 10월까지 빅토리아피크 일대의 호화주택 8채를 수년 전 구매 가격의 절반에 팔아치웠다"면서 "고령화와 저출산, 지정학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홍콩 부동산 시장은 회복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홍콩 호화주택의 반값 처분 소식은 올해 내내 계속된 이슈였다. 지난 5월 부도 위기에 몰린 중국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그룹의 쉬자인 회장이 소유했던 빅토리아피크 부근 호화 빌라 블랙스 링크 3채 중 1채가 6000만달러(약 870억원)의 가격에 팔린 것이 큰 뉴스였다. 이는 1년 전에 비해 절반가량 떨어진 가격이었다. 채권자들은 전용 면적이 각각 515㎡(약 156평), 460㎡(약 139평)인 나머지 2채도 매각을 추진 중인데 2023년 말 15억 홍콩달러였던 가격을 9억 홍콩달러로 40%나 내렸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중국 경제관찰보가 보도했다.
헝다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캐나다 시민권자 샤하이쥔도 지난 6월 노스포인트 인근 산 정상 부근의 265㎡(약 80평)짜리 복층식 아파트를 8200만 홍콩달러(약 148억원)에 매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는 2023년 6월 시세 1억6000만 홍콩달러와 비교하면 49% 하락한 가격이었다고 한다. 절반값에 팔린 것이다.
중국 산둥성 중롄석유화학 회장을 지낸 쉬즈밍이 소유한 홍콩 주룽역 인근 고급 아파트 6채도 은행에 넘겨져 지난 11월 말 4억1000만 홍콩달러(약 760억원)에 매각됐다. 은행 측은 3년 전인 2021년 13억 홍콩달러에 아파트 6채를 시장에 내놨는데, 최종 거래 가격은 이 가격의 32%에 불과했다. 3분의1 가격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홍콩 부동산 거부들도 속속 집을 처분하고 있다. 부동산 거물로 꼽히는 홍콩 여배우 류자링은 지난 4월 홍콩섬 남부 웡척항 인근 해안의 마리넬라 아파트 55평형을 7380만 홍콩달러(약 138억원)에 매각했다. 2011년 매입 당시 가격 5272만 홍콩달러보다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수년 전 최고 가격(9000만 홍콩달러)에 비해서는 18% 정도 떨어진 시세라고 한다. 한 달 뒤에는 류자링의 소개로 이 아파트를 구입했던 홍콩 가수 왕페이도 6450만 홍콩달러에 아파트를 팔았다고 홍콩 매체들은 전했다. 류자링과 왕페이가 매각한 아파트가 비슷한 평형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시간이 갈수록 시세가 떨어지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홍콩 증권거래소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photo 뉴시스
리카싱 회장의 선견지명
홍콩 부동산 시장은 2021년 하반기를 정점으로 빠른 속도로 하락을 거듭했다. 홍콩 개인주택 매매가격 지수는 2021년 말부터 2년 동안 21%가 떨어졌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의 반응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기존 소유자들이 물건을 내놔도 가격이 더 내려갈 것으로 보고 원매자가 나서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감하게 가격을 내려 할인 판매를 시작한 곳은 홍콩 부호 리카싱 회장이 창업한 청쿵그룹이었다. 청쿵그룹은 2023년 8월 주룽반도 동쪽 야우퉁 지역의 신규 아파트 '코스트 라인 2기' 132가구를 7년 전 가격으로 분양했다. 주변 시세보다 30%가 싸서 순식간에 물량이 동났다. 중국 대륙에서 분양 신청자가 대거 몰렸다고 한다. 청쿵그룹은 지난 4월에도 홍콩섬 남부 웡척항의 블루 코스트 아파트 단지 422가구를 주변 시세보다 30% 저렴한 가격으로 분양했다. 역시 높은 경쟁률을 보이면서 분양에 성공했다.
중국 내에서는 "리카싱은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나왔다. 홍콩 부동산 시장의 하락을 예상하고 과감하게 분양가를 낮춘 전략이 통했다는 것이다. 리카싱 회장은 2021년 초부터 측근들에게 "산 비가 오려 하니 누각에 바람이 가득하다(山雨欲來風滿樓)"면서 자산을 팔아 현금을 확보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대지진' 등의 영화로 유명한 중국의 펑샤오강 감독도 발이 빨랐다. 그는 2023년 5월 빅토리아항을 내려다보는 미드레벨의 54평형 아파트를 1억1800만 홍콩달러(약 220억원)에 매각했다. 매입 가격보다 6000만 홍콩달러 비싼 가격으로 적잖은 수익을 남겼다. 202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홍콩 부동산도 재빨리 처분한 것이다.
홍콩 부동산 시장 침체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금융 시장으로 보면 미국 금리 인상의 여파로 2022년 초부터 가파르게 오른 금리가 한 요인이다. 2022년 3월 0.50%였던 홍콩 기준금리는 2023년 8월 5.75%까지 치솟았다. 대출에 따른 이자 비용이 큰 폭으로 오른 것이다. 위안화가 미국 달러에 대해 약세를 보인 것도 영향을 미쳤다. 홍콩달러는 페그제(고정환율제)로 미국 달러 가치와 연동돼 있어 덩달아 위안화에 대해 강세를 보였다. 중국인 투자자가 위안화를 들고 와서 홍콩 부동산을 사려면 오른 환율만큼 가격이 비싸지는 효과가 생긴 것이다.
중국 부동산 거품 붕괴가 직격탄
가장 큰 요인은 중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 붕괴였다. 홍콩은 전형적인 중계무역항으로 중국 수출입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경제가 중국과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홍콩 경제는 중국이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제로코로나 방역 정책 등을 시행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상하이가 봉쇄된 2022년 홍콩의 경제성장률은 -3.7%를 기록했다. 부동산 시장도 2021년 중국 헝다그룹 파산 위기 이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국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는 만큼 홍콩 부동산 경기도 가라앉았다. 부동산 시장 거품 붕괴로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중국 부호들은 줄줄이 홍콩 내 호화주택을 시장에 내놨다. 은행 등 채권자가 압류한 호화주택도 경매 시장에 쏟아졌다.
2020년 도입된 홍콩 보안법도 문제였다. 홍콩 내 자산가, 글로벌 금융회사와 투자은행 고위층 등 홍콩 호화주택 수요층이 싱가포르 등지로 대거 이탈하면서 시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부동산 시장이 계속 추락하자 홍콩 당국은 기존 규제 정책을 대거 폐지하는 등 부동산 경기 부양에 나섰다. 지난 2월 외국인이나 중국인이 홍콩 부동산을 살 때 부과하는 인지세(15%)를 폐지했고, 2주택자가 내는 7.5%의 인지세도 없앴다. 또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비율(LTV)도 완화했다. 이런 조치의 효과로 지난 3~4월 홍콩 부동산 가격은 내림세를 멈추고 소폭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5월부터는 다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추세로 돌아섰다.
부동산 거래량도 회복 추세를 보였다. 홍콩경제일보에 따르면 2024년 들어 9월까지 1억 홍콩달러(약 187억원) 이상의 호화주택 거래 건수는 72건으로 2023년 한 해 59건보다 22% 증가했다. 매매 가격이 10억 홍콩달러(1870억원) 이상인 거래가 3건, 6억 홍콩달러 이상이 9건으로 대형 거래가 많았다고 한다.
"구조적인 하락… 회복 쉽지 않다"
이렇게 거래량은 늘어났지만, 가격 자체는 여전히 하락 압력이 크다고 한다. 홍콩 최고의 해수욕장이 있는 리펄스베이의 한 호화 아파트는 지난 10월 하순 4억7000만 홍콩달러(약 880억원)에 팔렸는데, 이는 원래 소유주가 2018년 매입 당시 지불한 4억9000만 홍콩달러보다 낮은 가격이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보도했다. 6년 전 가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홍콩 부동산 시장 침체는 주기적인 요인보다 구조적인 요인이 더 커서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홍콩 증시는 2020년 보안법 도입 이후 거래액수가 해마다 급감하고 있다. 2024년 들어 9월까지 증시를 통한 자금 조달 규모는 2018년 같은 시기의 30%에 불과하다고 한다. 홍콩과 중국의 부호들도 홍콩 금융회사에 맡긴 자금을 빼내 싱가포르로 옮기는 추세이다. 중국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반발로 젊은 엘리트 인력의 유출도 가속화되고 있다. 2018년부터 2022년 사이에 청년(25~39세) 노동인구는 152만명에서 132만명으로 20만명이 감소했다. 자유를 찾아 영국 등지로 이민을 택한 것이다.
여기에 2022년 기준 홍콩의 합계출산율은 0.70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낮은 수준이다. 반면 노인 인구는 급증하고 있어 2040년에는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33%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홍콩 정부는 중국 대륙의 인재를 적극 유치해 틈새를 메우려고 하지만, 인구 구조 변화와 지정학적 요인 등을 감안하면 홍콩 부동산 시장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주간조선